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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랑비탈 Sep 02. 2023

5. 상실과 회복

<소설> 애니메이션 회사


사랑보다 진한 유혹이 어디 있을까?

그날은 작업실이 (권도현의 사무실이 있는) 2층에서 1층으로 옮긴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빌어먹을, 그 첫사랑과의 마지막 통화가 있었던 날이었다.

나는 꿋꿋하게 하루를 버텼다.

그런데 야근할 때, 수영언니가 셀에 타프 구멍을 뚫어 오라고 시켰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유치했던 젊은 날에는 그런 종류의 노동은 내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30대인 수영언니도 성숙하지 못하기는 나와 마찬가지였을까.

내가 입사하기 전까지는 수영언니가 직접 셀에 타프구멍을 뚫었는데 내가 사무실에 드나들자 수영언니는 슬쩍 나에게 구멍 뚫린 셀을 총무과에 신청하도록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사무실에 올라가 청구서를 내밀었을 때, 총무과장이 말했다.


“선화부에서 쓰는 것은 선화부에서 해야지, 이걸 갑자기 누가 하라고…… 이상 하네……”


의아한 내 표정 때문이었을까.

총무과장은 치프에게 직접 전화를 해주겠다고 수화기를 들었다.

그걸 지켜보던 권도현이 나를 향해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걱정하지 마! 셀에 구멍 뚫어서 보내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가 있어!”


권도현의 말을 듣고 있던 총무과장이 염려하는 투로 말했다.


“어떻게 하려고 그래? 이건 이미 부서장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인데…… 다른 회사도 이런 건 다, 직접 해서 쓴다구……”


권도현은 총무과장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오직 내 얼굴만 바라보고,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뚫어서 보내줄게!”


그때, 나는 아무런 걱정도 없었는데……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았는데 권도현은 나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는 나도 모르는 내 표정을 읽어 내는데 특별한 재주가 있었다. 그것은 한 집에서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사람들만 느낄 수 있는 아주 예민한 반응이었다. 그것도 애정을 가진 피붙이만 느낄 수 있는.

권도현은 누군가가 셀의 구멍을 뚫어주지 않으면 그 일은 결국 신인인 내 몫이 될 거라고 생각한 거 같았다.     

                                          



30대 중반으로 향하는 나이 때문일까?

수영언니는 사회생활에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었다.

채경언니처럼 화려하게 꾸미지는 않았지만 한때는 꽤 예뻤을 단아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미모가 빛을 발하는 동안에는 자기 성찰이나 인격수양 따위는 할 필요가 없었는지, 인격의 성장은 과거의 어느 시점에 머물러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뭔가 틀어지고 있다는 것을 수영언니 본인만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나이와 미모와 인격의 황금률이 조금씩 틀어지고 있다는 것을.

과거의 미모에 기댄 자존심은 모난 성격으로 돌출되어 사람들과의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단아한 미모를 자랑했던 시절의 고약한 취미였을까?

수영언니는 교만한 여왕처럼 행동하다 사람들에게 무안을 당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점점 소극적이 되었다.

그런데 신인으로 들어온 내가 다른 부서와 연계된 일을 무탈하게 처리하자 수영언니는 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권도현 덕분에 우리 부서에서 쓰는 셀의 타프 구멍은 제록스에서 작업을 대신해 주게 되었는데 그건 어느 모로 보나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어느 회사도 자기 부서에서 쓰는 셀을 다른 부서에서 작업해 주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그날은 작업을 해주던 제록스의 남자 직원들이 야근을 하지 않고 모두 일찍 퇴근한 날이었다.

수영언니의 실수였다.

정상근무 시간에 오더를 올렸어야 했는데, 수영언니는 나에게 직접 셀에 타프 구멍을 뚫어오라고 시켰다.

셀이 없다고!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언니! 저 그거 안 해봐서 못 해요!”


수영언니는 나의 당당한 거절에 기가 막혔을 것이다. 수영언니는 처음으로 나에게 핏대를 올리며 말했다.  


“지금처럼 바쁠 때, 못 하는 게 어딨냐?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거지! 우리 신인 때는 더 한 것도 했어!”     


폐허에 버려진 것 같은 그날, 그 일만은 하고 싶지 않았다.

권도현이 없었다면 과연 내가 그런 고집을 부렸을까.     

2층에 올라갔을 때, 권도현이 나를 보고 지나갔다. 그는 한 번 더, 나를 찾을 것이다. 아니, 보고 싶어 할 것이다.

셀과 타프 구멍을 뚫는 기구를 앞에 놓고, 나는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그리고 속으로 되뇌었다.

‘안 나타나기만 해 봐라. 너는 끝이다!’라고.

아! 어쩌겠는가, 나는 그 순간에도 사랑을 게임처럼 즐기고 있었다.


권도현은 다시, 내 앞을 지나가다 총무과 직원에게 “왜?”하고 짧게 물었다.


“울어요. 타프구멍 뚫는 거, 못 한다고……”


총무과 여직원의 과장된 말투에 나는 조금 놀랐다.

울고 있다니!

단지, 안구만 촉촉하게 적시고 있었을 뿐인데……  

중성적인 이미지의 그녀는 평소 권도현과 나 사이에서 투명인간처럼 행동했다.


권도현이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로 들어갔다.

곧, 채경언니와 수영언니가 올라왔다.

급하게 올라온 수영언니가 교활하게 얼굴을 바꾸면서 말했다.


“울긴 왜 우냐? 못하면 못한다고 하지!”


마치 막냇동생의 응석을 받아주는 듯한 말투였다.

그리고 채경언니가 권도현의 방에서 나오면서 말했다.


“희망이는 오늘, 그만 퇴근해!”     


나는 위로받고 싶었다.

그날이라면 권도현에게 마음을 열 수 있을 것 같았다.

지하철역으로 가면서 혹시 그의 차가 내 뒤를 따라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계속 차도를 흘깃거렸다.     


플랫폼은 한산했다.

지하철의 구내방송에서 양희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흘러나왔고 회사원 차림의 30대 초반 남자가 맑은 목소리로 조그맣게 따라 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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