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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랑비탈 Aug 19. 2023

3. 하… 씨, 이게 뭐야!

<소설> 애니메이션 회사



선화부 치프인 수영언니는 사무실과 관련된 업무를 나에게 맡기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작업에 필요한 여러 가지 것들을 사무실에 요청하는 일이었다.

나는 사무실에 드나들면서 권도현의 얼굴을 매일 보게 되었다.

그즈음, 권도현도 내 방의 문을 열어보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권도현은 내가 사무실에 갈 때마다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학창 시절의 선생님들처럼 ‘희망’이라는 웅장한 이름 때문에 친근감을 느낀 것일까?

처음에는 반가운 듯, 그다음에는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나는 그가 사랑과 욕망 사이에 있는 어느 지점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나는 화가 났다.

하… 씨! 이게 뭐야! 이제 겨우 사회생활을 시작했는데!

나는 이른바 남녀상열지사 때문에 사회생활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렇지만 그와 마주칠 때마다 꽃물처럼 그의 얼굴에 물든 설렘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는 순간, 나는 당황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틀림없이 결혼한 남자일 터인데, 그런 시간은 꽤 오래 지속되었다.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눈길로 바라보는 그에게 흥건하게 배어 나온 그 무엇이 내 마음을 부끄럽게 적실 때마다, 나는 잠시 ‘우리가 어디서 만난 적이 있던가?’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나는 점심시간, 휴게실에 있는 자판기 앞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은정에게 말했다.      


“권 실장님 나만 보면 빤히 쳐다본다.”


“너 좋아하는 거 아냐?”


“그건 아닐걸! 그 사람 손가락에 18K 실반지를 끼고 있었던 걸 본 거 같아! 왠지 그런 반지가 더 진실해 보이지 않아? ……18K 실반지를 끼고 있다는 게 뭔가 특별해 보여! 나는 18K 반지를 단정하게 끼고 있는 남자들을 보면 순수해 보이더라!”


“그거 확실해? 18K 반지?”


“그랬던 거 같아! 그 반지를 보면서 순수한 데가 있네! 그런데 왜 나한테 관심을 갖지,라고 생각했던 거 같아!”


“미스터리야! 그런데 권실장님 옷차림보면 여자가 없는 사람 같아! 여자가 있으면 맨날 그렇게 똑같은 옷만 입고 다니겠어?


나는 그 반지가 누군가에 대한 사랑일 거라고 생각했다.

특별한 사랑에 대한 약속.

그래서 그에게 더 이상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휴먼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권도현의 행동은 좀 유별났다.

세련되게 치장하고 다녔던 그 계통의 여자들과 다르게 화장기 없이 순진무구한 얼굴로 다녔던 내가 안쓰럽게 느껴졌던 것일까?

나에 관한 일이라면 주변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극성스러운 보호자처럼 나섰다.

사무실에서 총무과장에게 물품 청구서를 건네면 권도현이 먼저 가로채 검토하거나, 혹여 총무과장이 물품지급을 다음 날로 미루면 굳이 그럴 필요까지 없었는데 총무과장의 말을 막고 나서면서, 곧 보내주겠다고 나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연약하고 무력한 존재처럼 느껴졌다.

어느 날, 총무과장이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


“권 실장님은 희망 씨 흑기사야! 희망 씨를 위해서라면, 아마 불에도 뛰어들 거야!”


나는 총무과장에게 순정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촌스러운 대사를 들을 때마다, 왜? 나에게 저런 말을 하는 걸까? 가정이 있는 그는 나와 상관없는 사람일 텐데,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말들은 무시하려고 해도 사진첩의 멈춘 시간처럼,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그날은 한 편의 TV 시리즈를 끝내고, 모든 부서가 대기하면서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면서 매점에서 사 온 간식을 먹거나, 책을 읽으면서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감독실로부터 노란색 지급 딱지가 붙은 리테이크 씬이 들어왔다.

드물게 원형 타프가 필요한 까다로운 씬이었는데 굳게 잠긴 원형 타프의 나사가 풀리지 않아 도움을 요청하러 촬영실에 갔다.

마침, 그 자리에는 권도현이 총무 과장과 함께 내려와 있었다.

나는 촬영 기사에게 원형 타프를 내밀면서 말했다.


“지급으로 리테이크 씬이 왔는데 타프 나사가 풀리지 않아서…….”


권도현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 손에 있는 원형 타프를 가지고 가서 안간힘을 쓰며, 목장갑으로 나사를 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총무과장이 책상에 걸터앉은 채, 심드렁한 말투로 말했다.


“무슨 걱정이야! 해결사가 옆에 있는데…… 저러다 안 되면 이빨로라도 물어뜯을 거야!”


총무과장은 의도적으로 나에게 말을 흘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말이 진짜, 나에게 들으라고 하는 소리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가 나를 그렇게 좋아한단 말인가? 거기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사랑에 빠진 남자의 얼굴은 나이를 먹어도, 나이를 잊은 듯, 얼마나 순종적이고 해맑은 모습인가!

권도현의 얼굴은 감출 수 없는 동요와 흥분으로 햇살이 비춘 호수처럼 잔잔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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