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 셀이 필요해서 2층에 올라갔을 때, 그 신입이 롱 셀을 서툴게 다루자 내 주위를 맴돌고 있던 권도현이 “뭘 일을 그렇게 어렵게 해!” 하면서 신입에게 셀을 빼앗아 구멍을 뚫어 주었다. 그러면서 옆에 서 있는 나를 보며 한없이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왜, 나만 보면 도망가지?”
대답이 없자, 권도현은 나에게 다시 부드러운 말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왜, 나만 보면 도망가지?”
다른 직원이 바로 옆에 있고, 칸막이 사이로 효과부 사람들이 다 듣고 있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는 몹시 답답한 거 같았다.
은정이 말했다.
“도망갔어?”
“아니, 그냥 피한 거지……”
“나라면 한 번 만나볼 거 같아……”
“너가? 너는 나보다 더 보수적이잖아!”
“그래도…… 생각해 봤는데 나라면 한 번 만나볼 거 같아!”
“정말?”
나는 은정에게 말했다.
사랑이 허용되지 않는 관계에서 내가 달리 할 말이 뭐가 있겠느냐고.
침묵 밖에.
우리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고.
그도 그걸 모르는 것 같지 않다고.
그렇지만 내 마음의 작은 한 조각이라도 확인하고 싶었던 거 같다고.
가만히 듣고 있던 은정이 왜, 만나보지도 않고 꼭, 그렇게만 생각해?라고 말했다.
권도현의 사랑은 나에게 맞지 않은 옷처럼 느껴졌다.
청춘의 낭만적인 시간은 스킵해야 될 것 같은 기분.
이를테면 둘이서 손을 꼭 잡고 프랑스 문화원에 가서 같이 영화를 본다거나, 미술관에 가서 그림을 본다든지 하는 것들을 말이다.
남자 친구와 함께 그 시간을 즐기지 못한다는 것은 내 인생에 커다란 손실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마치 마법처럼 통 속에서 하얗게 감기는 솜사탕을 먹어보지도 못하고 지나가는 유년시절과 다름없는 것 같았다.
청춘의 낭만적인 사랑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가슴에 물결이 일렁이는 듯한 파동이 있었지만 권도현은 나의 연애조건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래서 나는 권도현의 지난 이력에 대해 별 관심을 두지 않았던 거 같다. 아직 세상에 처음 나온 호기심으로 두들이고 싶은 창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권도현은 종종 내 작업실에 들어와 있었다.
토요일, 내가 미처 출근하기 전의 이른 시간에.
그런 날의 그는 꽤 멋진 차림이었다.
옷차림에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던그가 더블벤트 스타일의 정장을 입고 내가 좋아하는 블루드레스 셔츠까지 갖춰 입었다(사람들은 스포츠 마니아였던 그가 체격도 좋고 잘 생긴 남자라고 말했다).
양복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넣고 어느 때는 창가에서, 어느 때는 내 책상 앞에 서 있었다.
그럴 때마다 공교롭게 나에게는 일행이 있었다―신은 우리들의 관계를 허락하지 않는 것 같았다. 사랑이란 신의 의지를 이탈한 인간의 자유의지일까? 그러나 나는 신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언제나 깨닫고 있었다―권도현은 번번이 일행과 함께 들어오는 나를 보고 방을 나갔다.
지금 생각하면 많이 힘들었을 터인데, 나는 이미 금을 그어놓은 상태라 권도현의 저린 가슴은 눈곱만치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 때마다, 냉정하고 새침하게 행동하면서 그 상황을 즐겼던 거 같다. 사랑을 받기만 하는 사람에게 사랑은 단지 게임에 불과하니까.
시간이 지나면서 권도현도 나에게 가까이 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나를 응시하는 권도현의 눈빛은 고요해졌지만, 깊은 시름으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우리에게는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서로 읽히는 것들이 있었다.
권도현은 나의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했을 것이다.
흔히 말하는, 앞길이 구만리 같은 나의 미래에 대해.
그러나 어느 곳에 가든 변함없는 권도현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커다란 산처럼 나를 보호하고 있는 느낌.
권도현이 나에게 각별하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런데 내가 벅차게 느껴졌을까?
점심시간이었다.
동료들과 밖에서 밥을 먹고 작업실로 들어가는 로비에서 과장들과 함께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그와 눈빛이 마주쳤다.
사고였다.
그는 시선을 어디에도 두지 못하고 허공에서 헤매면서 부자연스럽게 연신 헛기침을 하며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옆에 있는 희재 언니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렇게 그의 일행이 우리를 스쳐 지나갔을 때, 희재 언니가 물개박수를 치며 웃기 시작했다.
“얘네 정말 웃겨! 서로 보자마자 권실장님은 저쪽으로 고개를 획 돌리고 얘는 이쪽으로 고개를 획 돌리는데 웃음이 나오는 거, 참느라고 죽는 줄 알았어!”
그때쯤 나도 권도현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주변사람들의 놀림감이 되었지만 우리들의 이야기는 (감독들의 스캔들이 끊임없이 돌고 도는) 그 말 많던 동네에서 은밀하게 보호되고 있었다. 세상에는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권도현은 내 주변에 cctv를 깔아 논 것처럼 나와 친한 사람들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들에게서 나의 한 부분이라도 발견하고 싶었던 것일까.
친해진 지 불과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까지 나에게 한 입처럼 똑같이 말했다.
“내가 너랑 친한 줄 아나 봐. 전에는 안 그랬는데 요즘은 내가 지나가면 꼭 쳐다본다!”
하루는 회사 근처에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고 온 같은 부서의 동료들이 내 얼굴을 보자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오늘 희망이가 거기에 꼭 갔어야 하는 건데! 권 실장님이 왔는데, 우리를 보자마자 막 눈으로 널 찾는 거야! 없는 너를 두리번거리면서 계속 찾으니까, 옆에 있는 총무과장이 권 실장님을 툭 치면서 ‘누굴 그렇게 찾아! 하고 핀잔을 주는데 얼마나 웃겼다고! 희망이가 그걸 꼭 봤어야 하는 건데! 권 실장님, 정말 웃겨!”
희재언니의 말이 끝나자 옆자리의 현숙 씨가 웃으면서 말했다
“권실장님 진짜 웃긴다! 내가 전에 미정이 보러 체킹실에 가는데 권실장님이 진행 보는 애들하고 야! 너 뭐, 어쩌구저쩌구 장난치면서 피자를 먹는 거야. 그러다가 날 보더니 갑자기 먹던 피자를 슬쩍 내려놓고 슬금슬금 내 눈치를 보는데 얼마나 웃겼다구! 그래서 내가 일부러 손뼉 치면서 와! 맛있겠다! 나도 먹을래! 하고 가까이 가니까 권실장님이 사무실로 슬쩍 들어가는 거 있지! 희망이 때문에 그러는 거 같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