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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랑비탈 Sep 25. 2023

9. 암투에 휘말리다

<소설> 애니메이션 회사


TV 시리즈 1,2,3화가 끝났는데 동화부에서 4화가 넘어오지 않고 있었다.

그날, 우리는 삼삼오오 모여 동화부 작감(동화에서 파이널 체킹을 담당하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출근하자마자 들은 그의 교통사고 소식은 충격이었다.

그런데 점심시간이 되자 교통사고가 아니라, 7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그가 뛰어내렸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믿을만한 스피커인 희재언니가 말했다.


“그 사람 부인이 우리 언니네 회사 동화에 다니는데 지금 임신 중이래! 다음 달이 출산이라는데 불쌍해서 어쩌냐!”


현주 언니가 말했다.


“그 사람 나쁘다! 부인이 다음 달 출산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여자 혼자 애는 어떡하라구!”


“우울증이 있었다나 봐! 원래 이 계통 사람들이 낮 밤이 바뀐 사람들이 많아서 우울증이 많잖아!”     


“그래도 그렇지! 다음 달이면 애가 나오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전 날도 얼굴을 봤는데…… 유난히 친절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은정과 나는 그 사람을 경계하고 있었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은정과 점심을 먹으러 회사 앞에 있는 식당에 갔을 때, 그가 동화부 사람들과 밥을 먹다가 갑자기 우리 테이블로 왔다.


“밥 먹으러 왔어요?”


우리는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멋쩍게 예, 하고 대답했다. 민망했을 터인데 인내심 있게 그는 웃는 낯으로 은정과 나를 보며 “맛있게 먹어요!”라고 말하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우리는 ‘저 사람, 왜 저러지!’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몇 번 더 아는 척을 했고 우리는 계속 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까뮈의 소설이 떠올랐다. ‘자살의 원인이 친절하지 않았던 우리에게도 있지 않을까?’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화재는 전직 CF 모델이었던 유정 씨의 결근으로 이어졌다.

수화 씨가 유정 씨의 빈자리를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벌써 며칠 째야? 계속 안 나오네! 오빠가 감독이라 짤리지도 않고!”


선향언니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또 수술한 거 아냐?”


수화 씨가 눈을 반짝이며 선향 언니를 쳐다보며 말했다.     


“무슨 수술?”


“내가 유정 씨가 옆에 있는 미영 씨에게 얘기하는 거 들었는데 전에 안 나왔을 때 중절 수술 때문에 안 나온 거래! 그때도 왜 며칠 안 나왔잖아!”


현숙 씨가 말했다.


“정말? 정 감독 대단해! 그래도 동생을 끔찍하게 챙기잖아!”


희재 언니가 말했다.


“정감독이 우리 오빠랑 친구잖아! 집에서도 엄청 가정적이래! 술자리에서 친구들이 불러도 잘 안 나온대! 이 계통 사람들 하고는 좀 달라!”


그때, 채경언니의 자리에서 흥분한 수영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언니! 나 여태까지 사회생활 그렇게 하지 않았어!”     


웅성웅성하던 작업실이 갑자기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나 너랑 같이 일 못하니까, 당장 사표 써! 나 너 못 믿겠어!”     


채경언니의 목소리도 덩달아 커졌다.

잠깐의 정적이 흐른 후, 현숙 씨가 조그맣게 “이건 또 뭔 시추에이션이야?”라고 말했고, 우리는 모두 각자의 자리로 흩어졌다.     


                                                



채경언니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큰 소리로 속내를 드러낸 걸 보면 수영언니를 내치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누군가의 입에서인지 회장으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는 총감독이 최근 수영언니를 총애하기 시작했는데 그걸 믿고 수영언니가 채경언니 자리를 넘봤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수영언니에게 그런 면이 있었나?

……수영언니의 나르시시즘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채경언니와 출근투쟁을 하는 수영언니의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수영언니는 수시로 총감독의 방에 들락거리면서 도움을 요청하는 눈치였다. (아직도 수영언니는 본인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하고 있구나!) 보기 민망했다.

채경언니의 노골적인 업무배제에 수영언니가 출근하지 않은 토요일, 채경언니가 선화부 자리로 와서 말했다.     


“오늘 사장님이 너희들 부른다고 하셨어! 이따가 나랑 같이 사장실에 올라가서 너희들이 생각하고 있는 걸, 솔직하게 다 말씀드려! 너희들도 하고 싶은 말이 있을 거 아냐!”


팀원들이 대답했다.     

“응”

“알았어! 언니!”

“알았어요…… ”     


선화부 사람들은 모두 채경언니가 오랫동안 몸담았던 L프로덕션 출신이었고 수영언니만 H프로덕션 출신이었다.

애초에 팀을 짤 때부터 채경언니의 머릿속에는 하극상에 대비한 치밀한 계산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수영언니는 왜, 그런 걸 미리 간파하지 못했을까? 여차하면 수영언니 편에 설 사람이 없다는 것을!

수영언니는 온갖 소문이 파다한 채경언니에게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겉으로 표시를 내지는 않았지만 채경언니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수영언니는 모든 걸 통제하고 싶어 하는 관리자였다.

우리랑 같이 웃고 떠들면서 명동을 돌아치거나 함께 인생 떡볶이 집을 찾아다닌 것으로 팀을 장악했다고 생각한 것일까?

우리는 수영언니가 불편했다. 함께 웃고 떠들었지만 마음속에는 늘 불편한 구석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입사한 지 일주일쯤 지났을 때, 희재언니가 점심을 먹고 화장을 고치면서 한 손으로 립팔레트를 들고 남자친구가 사줬다고 자랑했다.

어디! 하면서 수영언니가 희재언니 자리로 가더니 립팔레트에서 펄이 섞인 러블리 핑크를 입술에 발랐다. 그리고 어때? 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예뻤다!

나는 “사랑스럽고 지적으로 보여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수영언니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 나를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역시 희망이는 아부의 천재야!”


그리고 미소 띤 얼굴로 유유히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진심이었는데…… 그런데 여러 사람이 있는 앞에서 저렇게 말하는 악마성은 뭘까? 그리고 저 흐뭇해하는 미소는?  


      



모두가 퇴근한 토요일 오후, 팀원들과 함께 사무실을 통과해서 사장실로 들어가는 것을 권도현이 책상에 앉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 나는 핑크색 스트라이프 셔츠에 로즈 핑크 스커트와 재킷을 입고 있었다. 한창 예뻤을 나이였고, 그때 나의 퍼스널 컬러는 단연 핑크였다.


테이블 중앙에 사장이 앉아 있었고 그 옆에 채경언니가 앉으면서 말했다.     


“어서들 앉아! 그리고 치프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사장님께 다 말씀드려!”     


서로 눈치만 보고 쭈뼛거리다 경력 순으로 희재 언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희재언니는 두뇌회전도 빠르고 일머리도 뛰어났으나 공적인 자리에서 말하는 것은 영 젬병이었다.

중언부언하면서 수영언니가 일방적이고 독재적이라고 말했던가? 바통을 이어받은 현주언니 또한 억지로 끌려 나온 어린아이처럼 자신감 없는 말투로 산만하게 불만을 늘어놓고 있었다.

굳이 신인인 나까지 나설 생각은 없었는데 순간 대기업 임원 출신인 사장이 우리를 한심하게 바라볼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도 수영언니 때문에 적잖이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터라 이래저래 답답한 마음에 입을 열었다.


“종종 본인도 해결하기 어려운 업무를 시키면서 지나치게 완벽함을 요구하는 데다 마땅히 치프가 책임져야 할 일을 아랫사람한테 미룰 때가 많아서 윗사람으로 믿고 일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 말이 그렇게 임팩트 있게 전달될 줄은 몰랐다.

채경언니는 생각지도 못한 지원군의 출현에 환호하면서, 사장에게 강력하게 어필할 무기라도 발견한 듯 무지성적이고 무교양적인 리액션을 날 것 그대로 시전 했다.      


“어머나! 어머! 나는 얘를 제일 예뻐하는 줄 알았는데, 세상에 얘까지도 이런 말을 다하네!”     


내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채경언니만의 경쾌한 퍼포먼스였다.

60대 후반의 사장은 총감독과 채경언니 사이에서 총감독 쪽으로 기울어졌던 바늘의 방향을 다시 조정해야 하는 당위성이 짙어지자 피로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찧겼구만!”     


나는 사장의 말이 억울하게 느껴졌지만 변명할 수 없었다.

수영언니가 만만하게 의지할 사람은 나밖에 없었으니까 나를 제일 예뻐했다는 말은 맞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능력을 사랑한 것이지 자연인인 나를 사랑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나대로 불만이 쌓여있었다.

수영언니는 언제나 권위적인 태도였고 나는 거절을 못하는 성격상의 문제로 수영언니의 부당한 요구까지 최선을 다해 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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