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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랑비탈 Oct 07. 2023

11. 빌런의 활약

<소설> 애니메이션 회사

일이 많아지면서 작업량은 쏟아지는데 작업에 속도가 붙지 않았다.

나에게는 적당히 날려주는 기술이 부족했다. 딜레마였다.

남들처럼 열심히 날리다 씬을 넘기기 전에 잠깐 고민하고, 처음부터 다시 작업해서 넘기느라 시간이 두 배로 들었다.

그게 나에게는 양심의 문제로 다가왔다.

게다가 씬에 문제가 있으면 다른 동료들은 향숙 언니를 통해 해결했지만 나는 일을 제대로 배우고 싶은 욕심에 원화부나 체킹실에 직접 찾아가 문제를 해결하느라고 시간도 많이 소비됐다.

향숙 언니도 번거로운 자기의 일을 덜어주니까 은근히 반기는 눈치였지만 수영언니처럼 그걸 매수로 보상해주지는 않았다.     


나보다 한 살 어리지만 경력으로는 앞선 정미는 과감하게 날려주면서 계속 매수를 뽑아내고 있었다.

그렇게 과감하게 날리는데도 말 한마디 안 하는 향숙언니가 이상했다. 원래 이 계통은 그런 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만 바보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한다면 일이 많은 성수기에는 기본급의 두 배 이상은 거뜬히 가져갈 수 있었다.      


나는 뒤처지는 작업량 때문에 자존심이 상해있었다.

그래도 신인 때는 선이 좋다고 트레스(선화)의 귀신이 될 것 같다는 말까지 들었는데……

요즘은 신인인 성희도 날리는 요령을 터득한 것 같은데 나는 그게 잘 안 됐다.


벌써 며칠 째, 7시 30분에 출근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보다 한 시간 삼십 분 정도 일찍 출근해서 뒤처지는 작업량을 보충할 요량이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웬 우연이 그렇게 자주 발생하는 걸까?

2층에서 출근카드를 찍고 작업실로 내려오는 계단에서 사무실로 올라가는 권도현과 마주쳤다.

그는 버건디 목폴라에 그레이 컬러의 헤링본 모직 재킷을 입고 있었다.


그에게 목례를 하고 몇 걸음 내려오자 채경언니가 올라오고 있었다.

이런 일이 없었는데 이른 아침, 1층과 2층이 연결된 계단에서 세 사람이 동시에 만난 것이다.

내 등 뒤에서 권도현이 채경언니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야? 왜들 이렇게 일찍 와?”     


권도현에게 한 소리 들은 것처럼 생각한 채경언니의 목소리가 커졌다.     


“몰라, 나는 할 일이 있어서 일찍 온 건데!”     


회사 근처에 살았던 채경언니야 밀린 일이 있어 어쩌다 한 번 일찍 출근했겠지만 권도현은 왜, 또 그 시간에 출근한 것일까? 하는 생각까지만 했다, 그때는.      




채경언니가 아침 회의에 갔다 오더니 향숙언니를 불렀다.

곧 향숙언니의 날 선 목소리가 채경언니의 자리에서 가장 먼 내 자리에까지 포물선을 그리며 꽂혔다.      


“희망이는 안 돼! 손이 얼마나 느린데!”     


평소보다 두 옥타브쯤 올라간 목소리!

장렬하게 온몸을 던져 저지하는 목소리였다.

나는 그때 화산이 폭발하면서 고층 빌딩까지 화마가 뒤덮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어 채경언니의 (내용은 알 수 없는)낮은 목소리가 들렸고, 다시 솟아오른 향숙언니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나의 안녕을 여지없이 찢어놓고 있었다.     


“안 돼! 희망이는 성희보다 손이 더 느려! 그건 절대 안 돼! 그리고 이 계통의 룰이 있는데!”     


극구 반대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히스테리에 가까웠다. 이런 얘기를 수 십 명이 있는 작업실에서 저렇게 큰 소리로 하다니!

그녀의 태도가 새삼 신박했다.

그녀는 가끔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행동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곤 했는데 나에게 이렇게 막강한 전투력을 터뜨릴 줄은 몰랐다.     


누군가가 새로 온 치프가 대행보다 못하다는 말을 했다던데 그 말을 들은 것일까? 하긴 그 말이 내 귀에까지 들어왔다면 향숙언니는 들어도 여러 번 들었을 것이다. 그때마다 나에 대한 전투력을 쌓아온 것일까.     

이러고도 훗날 나에게 보험을 들어달라고 연락했던 걸 보면 향숙 언니도 참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공부든 일이든) 날리는 삶을 살아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 계통의 관례처럼 그렇게 일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계속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계통은 바쁠 때, 적당히 날릴 줄 아는 게 미덕인 사회였고, 꼼꼼하다는 것은 곧 손이 느리다는 평가가 내려지는 곳이었다.

그러니까 그즈음 나는 그때까지 내가 살아온 세계와 현실 사이에서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느라고 작업량을 제대로 뽑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속내를 향숙언니가 정말 몰랐을까?

슬프게도 수영언니라면 모를까, 향숙언니는 정말 몰랐을 것이다. 그녀는 그런 걸, 고민하고 사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시간이 날 때마다 소설책이나 문예지를 꺼내놓고 읽는 사람은 수영언니와 나, 단 둘 뿐이었다.


애니메이터들은 대부분 프리랜서였는데 경력순에 따라 ABCD로 급수가 나뉘어 있었다.

급수에 따라 기본급과 기본 매수가 정해져 있었고 기본 매수를 초과할 때마다 기본급에 더해진 보수를 받았다.

급수가 높을수록 기본매수와 기본급도 높았지만 초과되는 장당 단가도 높았다(나와 A급인 희재 언니와의 초과되는 장당 단가는 2배 가까이 차이가 났다).

나는 이제 막 신인을 벗어난 D급이었는데 아마 윗선에서 내 급수를 올려주라는 사인이 있었던 거 같았다.

급수를 조정하는 것은 치프의 고유한 권한이었지만 잔머리 외에는 앞뒤 생각의 폭이 넓지 않았던 향숙언니는 이때 본인이 악수를 두었다는 것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돈 때문에 일찍 출근한 것이 아니었는데 권도현은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나는 향숙 언니의 반응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급수를 올린다고 해도 그만큼 매수를 빼야 하는데 내 융통성으로는 그럴만한 재주가 없었다.     


생각해 보면 권도현이 내 처우에 관여했던 일이 처음은 아니었다.

수습기간이 끝났을 때, 갑자기 치프나 부서장처럼 월급제로 전환되었다.

월급제로 전환되면서 기본급이 40% 올랐는데 그건 프리랜서처럼 성수기가 돼도 돈을 더 많이 가져가는 구조가 아니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게 치프로 가는 승진코스처럼 읽혔다.

가장 불편한 시선을 보낸 이들은 입사 동기들이었다.

사이가 좋았던 그들은 내 앞에서 씁쓸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은정이조차도 나를 야망을 감추고 있는 출세지향적인 인물로 매도하고 있었다.     


“너는 곰 같은 여우야! 무서운 곰 같은 여우!”     


나는 억울했지만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때 사람들과 부딪치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수영언니는 다른 부서에서 넘어온 씬에 문제가 있으면 내 씬을 본인이 작업하는 대신 나를 감독실이나 원화부, 체킹실로 보내 문제를 해결하도록 했다.

전체적인 일의 흐름도 파악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걸 좋아했던 나는 별 불만이 없었는데 그걸 지켜보던 권도현은 프리랜서인 내가 다른 부서로 왔다 갔다 하면서 시간을 뺏기는 걸 손해라고 생각했던 거 같았다.

그러나 한 눈에도 자기 사람이 될 수 없는 부류라는 것을 알아차린 채경언니는 다른 신인들과의 형평성을 들어 반발했을 터이지만, 권도현의 의지를 막을 수는 없어 다소 낮은 기본급 40% 인상안으로 마무리했던 거 같다.     

      



때로 악연도 필요할 때가 있다.

향숙 언니의 무례한 반응은 나에게 갈 길을 제시해 주고 있었다.

마블이나 디즈니 같은 미국 애니메이션 회사의 하청을 주로 하는 한국의 메인 프로덕션―레이아웃, 원화, 동화, 선화, 칼라 등 주로 단순 그림작업에 주력―은 나와 적성이 맞지 않았던 것이다.

미국이나 일본의 애니메이션 제작 방식인 프리 프로덕션―계획 총괄―단계에서 일을 했으면 모를까?


그때를 생각하면 안타까웠다.

나는 언젠가 은정과 아이들을 데리고 극장에서 미아자키 하야오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보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말했다.     


“왜, 우린 저런 걸 하지 않았지?”     


포크로 티라미수를 떠먹던 은정이 택도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때, 그 인간들이 저런 생각이나 했겠냐?”     


“글쎄 말이야! 그땐 돈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는데…… ”     


“그렇게 착취해서 번 돈으로 땅 사고, 건물이나 지었지!”     


“그래! 그땐 그렇게 생각 안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까 완전 착취였어! 그리고 그때 생각해 보면 나도 참 미쳤던 거 같아! 그때 우리 회사에서 내가 제일 열심히 하지 않았냐?”     


은정이 웃으면서 말했다.     


“너 정말 왜 그랬냐? 꼭두새벽부터 출근해서……  우리는 너가 무슨 야심이 있어서 그러는 줄 알았어!”     


“아니, 나는 그냥 내 일을 열심히 한 거지!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완전 봉사였어! 불쌍한 사람들도 아니고 배 터지게 배부른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고 요즘 드는 생각인데 내가 왜, 수영언니 대신 일했을 때, 내가 안 했으면 당장 그 업무를 할 사람이 없었는데, 채경언니는 나한테 일만 주고, 보상 같은 건 살짝 모른 척 한 걸 보면 정말 양심이 없었던 거 같아! 지금 생각해 보면 순진했던 내 노동력만 도둑질한 거 야!”     


“자기한테 줄 선 사람이 아니니까 고생한 거는 알아도 그냥 모른 척 한 거지! 그 사람들은 너가 생각하는 숭고함은 1도 없는 사람들이야!”     


“그래도 후배가 그렇게 고생한 걸 알았으면 수고에 대한 대가는 있어야 되는 거 아냐? 그때 채경 언니한테 고맙다는 말도 못 들은 것 같아! 그 일은 내 일보다 채경언니 일이었는데!”     


“너를 견제했을 수도 있어! 아마 모르긴 해도 질투도 있었을 걸!”     


“정말? ……설마 그렇게 자존감이 낮을까? 능력도 있는데!”     


“그럴 수도 있어! 너를 떠오르는 경쟁자로 견제했을 수도 있어! 그런 사람들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맨날 남의 나라 하청이나 하는 거고!”     


“이런 영화들을 보면 정말 아쉬워! 하청이었지만 그래도 우리 회사가 세계 최대의 애니메이션 회사라고 했는데……”     


갑자기 은정의 말투에서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랬지! 삼사일에 TV 방송용, 20분짜리 한 편을 만들어내는 데는 우리밖에 없다고 했어! 몰리 생각나? 그때 방송국에서 추석에 방영해야 한다고 해서 우리가 일주일인가, 아니, 일주일도 아닌가? 야근하면서 며칠 만에 뚝딱, 만들었잖아!”     


“생각나지! 그런데 왜 저런 걸 만들 생각을 안 했는지 몰라! 만약에 오너 주변에 시를 쓰거나 소설을 쓰는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런 부류들과 교류했다면 우리나라 애니메이션 역사는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우디앨런 같은 영혼이 옆에 있었다면 말이야!”     


은정이 진지하게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내가 그때 회장하고 한 번, 통화했다고 했잖아!”     


“그래, 그때 방송하는 조카 때문에!”
 

“나이도 그만큼 되고, 살날도 얼마 남지 않았으면 자기 회사에 창단 멤버라고 하면 좀 뭉클한 기분이 드는 거 아니니! 그런데 그런 건, 단 1%도 없어! 목소리가 얼마나 거만하고 거드름을 피우는지, 통화하는 내내 괜히 전화했다는 생각만 들었다니까! 그리고 우리가 그만큼 열심히 했으면 우리한테 좀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니니? 좋았던 시절인연에 대한 감사 말이야! 그런데 저 사람은 아직도 자뻑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구나! 하는 기분이 들었어!”     


“그래, 그때 너가 그랬잖아! 모두 자기가 잘 나서 잘 된 줄 안 다구! 바쁠 때는 우리 맨날 야근에 집에도 못 가고 모텔에서 겨우 몇 시간 자면서 철야까지 했는데… 솔직히 회사 만들고 2년 좀 지나서 강남에 빌딩 지었으면 그거 우리 덕 아닌가?”


“그렇지!”     


나는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거기, 벽돌 몇 장은 내가 올린 거네!”


“몇 장뿐이야? 나도 그렇고!”     


“뭐가 이러냐! 자본주의의 구조가 슬프다! 슬퍼! 다수의 노력을 한쪽으로 완전 몰아주는 게임이잖아!”     


“그런데 그런 영광을 받은 자는 겸손한 마음이 없어! 그러니 그런 사람한테 저런 작품이 나올 리가 없지! 영혼의 흐름이 달라!”     


“……영혼의 흐름! 네 말이 맞는 거 같다! 오너가 철학이 있는 리더였더라면 우리나라 애니메이션 역사가 달라졌을 텐데!”     


전쟁을 겪은 배고픈 세대는 그런 고상한 지향성이 없어!”     


“그래! 그 세대에게 그런 지향성이 있었다면 그건 ‘발명’에 가까운 수준인 거지!”          

 

1980년대, 미국 애니메이션 제작단가가 오르면서 상대적으로 인건비가 싼 한국, 대만에 일감이 몰렸다.

전쟁을 겪고, 배고픔을 경험한 세대는 돈 세례에 취해있었다. 그들은 먹고 마시면서 현실적인 돈벌이에만 관심이 있었다.

작품을 만든다고 하는 사람들이 왜 좀 더 높은 곳에 시선을 두지 않았을까?

회사에 크리에이티브한 그룹이 있었다면 지금쯤 우리에게도 미아자키 하야오나 신카이 마코토 같은 감독들이 즐비하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훗날, 호기심으로 명리학에 관심을 가진 적이 있었다.

웃프게도 명리학 공부를 하면서 내가 왜 그곳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고 비주류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 조금은 억지이해가 되었다.

명리학 용어로 그곳은 식상(식신과 상관)을 쓰는 사람 천지였다.


식상은 예술적 재능을 말하는 데 대부분의 애니메이터들은 개성이 강한 상관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정열적이면서 독창적이고 재주도 뛰어나지만 현실주의자인 그들은 물질에 강한 집착을 보이면서 세속적인 향락을 추구했다.      


상관은 선을 넘는다.

자유분방한 사고, 그게 천재적인 예술성으로 발현되기도 하지만 어느 때는 퇴폐적인 속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나르시시스트이자 과시욕이 강한 그들은 거만한 태도로 상대를 무시하기도 하지만 어느 때는 눈물도 많고 인정도 많은 장점을 보이기도 한다.      

그들은 또 남의 눈에 띄는 유니크한 패션을 좋아한다.

나는 반도 패션 같은 보수적인 스타일의 브랜드를 입었는데 그들은 크레송이나 데코 데미안 같은 그 당시로는 다소 전위적인 디자이너의 옷들을 즐겨 입었다(그들은 종종 종합상사에 다니는 남자 친구로부터 옷 좀 단정하게 입고 다니라는 충고를 들어야 했다).


그리고 그들의 정서는 극과 극으로 출렁인다.

어느 때는 조증으로 어느 때는 우울증으로 술과 향락에 빠져들기도 하면서 욕망과 본능에 진심인 그들의 기질과 함께 때로는 문란한 사생활로 이어지기도 한다.      


결코 모범적인 라이프 스타일이라고 말할 수 없는 그들이 그 계통에서 인정받고 있는 것은 기발한 아이디어에 두뇌회전도 빠르고 순발력이 좋아 상업 애니메이션이 추구하는 가치에 부응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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