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인과 별거 중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는 총감독이 수영언니에게 어떤 사인을 보냈는지 모르지만 본인을 너무 사랑해서 그 나이까지 제대로 된 연애조차 해본 적이 없는 수영언니가 비현실적인 판단을 내리고 어리석게 행동한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내가 대행이 되었다.
채경언니도 내가 이미 치프의 일을 도맡아 하고 있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던 터라 공석에 대한 염려는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채경언니는 수영언니가 그만둔 지, 두 달이 되도록 후임자를 결정하지 않고 있었다.
같은 부서의 선배들도 내가 치프를 대신해 일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다른 부서에서 보낸 리테이크 씬들을 확인하고 있었을 때, 색지정 언니가 불렀다.
“희망아! 채경언니가 촬영실로 오래!”
“왜? 언니!”
“회의!”
채경언니가 제작회의에 나를 부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런데 내가 촬영실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할 때, 채경언니가 표정이 좋지 않은 얼굴로 나오고 있었다.
왜, 사람을 불러놓고 나가는 거지? 급한 일이 있나?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채경언니는 회의가 끝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때는.
그런데 잊히지 않는 한 토막은 제작실장이 채경언니를 향해 말리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다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표정을 바꿔 “우리 스타가 오셨네! 스타가 왔어!” 하고 농담을 했다. 그리고 내내 이어진 회의장의 싸한 분위기…… 이건 어디에 끼어 넣어야 퍼즐이 맞아떨어질까?
그렇다면 제작회의에 나를 부른 것은 채경언니가 아닌 제작 실장이었고, 채경언니는 마지못해 나를 부르고 자리를 박차고 나간 걸까?
채경언니를 따라 작업실을 나오는데 마침 매점 앞에 있던 경리과 직원이 채경언니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어디 가세요?”
채경 언니가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 밥 먹으러 가는데 너도 갈래?”
내가 불편한 걸까?
나는 이 자리가 형식적인 자리가 될 거라는 걸 직감했다.
채경언니가 하루 종일 그린 볼링 동호회 포스터를 내가 싸가지 없이 외면했을 때부터 채경언니와 나와의 관계가 서먹한 관계로 업그레이드된 것은 알겠는데, 이건 좀 치프로서 미숙한 행동이었다.
셋은 회사 근처의 고깃집으로 들어갔다.
눈에 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서빙을 하는 아르바이트의 안내대로 자리에 앉았을 때, 옆자리에 앉아 있었던 배경부 치프가 우리 일행을 보자 반색을 하며 우리 자리로 왔다. 그리고 채경 언니와 나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내가 보니까, 언니들이 나빠! 언니들이 맨날 막내만 시키는 거 같아! 전에도 혼자 남아서 대기하고 있더라고! 언니들이 그러면 안 돼!”
취기가 오른 배경부 치프에게 채경언니가 쏘아붙였다.
“오빠는! 누가 맨날 막내만 시킨다고 그래! 다 돌아가면서 하는 건데!”
“아냐, 내가 여러 번 봤어! 한 번은 꼭 얘기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알았으니까, 오빠는 술 그만 드시고 어서 집에나 들어가요! 어제도 선아가 오빠, 맨날 술 먹고 늦게 들어온다고 속상해하던데!”
“친구라고 선아 편만 들면 안 돼! 다 이유가 있는 거라고!”
배경부 치프가 돌아가자 채경언니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저렇게 맨날 술만 먹고 다니니까 애가 없지! 마누라 속 썩는 것도 모르고!”
채경언니가 서빙이 가져온 삼겹살을 숯불에 올려놓으면서 말했다.
“희망이가 계속하는 게 좋겠어? 아니면 치프를 새로 뽑는 게 좋겠어?”
이렇게 진지한 얘기를, 이렇게 복작거리는 삼겹살집에서 하다니!
나는 새로 산 티파니블루의 실크 원피스에 삼겹살 냄새가 배는 것에만 조용히 낙담하고 있었다.
선배들은 입사한 지, 채 1년도 안 된 내가 치프 자리에 앉는다면 이 계통의 기록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반대하지 않겠다고. 모난 성격의 치프들에게 스트레스를 받느니, 차라리 후배인 내가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거 같았다.
그렇지만 나는 거절했다. 채경언니도 그걸 바라는 눈치였다.
우리는 어색했다.
내가 소녀 가장이었던 그녀의 어려움을 어떻게 알겠는가.
감히, 내가 어떻게 그녀의 삶을 재단하겠는가. 그러나 그녀는 나를 어려워했다. 내 나이가 그녀보다 한참 어린데도.
그녀와 나는 스킨십이 불가능한 관계였다.
웨이브 컬이 들어간 단발파마에 한참 유행이었던 커다란 검은 뿔테 안경을 쓴 희재 언니가 안녕! 이란 말 대신 빅뉴스! 빅뉴스!라고 요란하게 떠들면서 출근했다.
각자의 자리에 앉아 화장을 하고 커피를 마시고 빵을 먹던 우리는 언니를 주목하고 있었다.
“치프가 정해졌대! 딸만 셋 있는 유부녀인데 맨날 아들타령만 하는 시어머니 때문에 남편이랑 대판 싸우고 친정에 와 있다가 채경언니한테 연락했나 봐! 완전 나이스 타이밍이지! 나이스 타이밍! 채경언니가 불쌍해서 그냥 오라고 했대!”
희재 언니의 주근깨는 그날따라 더 도드라져 (말괄량이 삐삐처럼) 희극적으로 보였다. 희재 언니의 친언니이자 채경언니의 절친인 은재 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일 것이다. 현숙 씨가 말했다.
“진짜 완전 나이스 타이밍이네! 그런데 요즘 세상에 왜 애가 셋이야?”
“아들 때문에 그랬겠지 뭐!”
“그래도 불쌍해서 오라고 했다는 게 말이 돼?”
손거울을 보며 눈썹을 그리던 수화 씨가 고개를 돌려 특유의 은근한 말투로 말했다
“수영언니 꼴 날까 봐, 허수아비를 앉히는 거지 뭐! 안 그래?”
현주 언니가 커피를 마시면서 말했다.
“성격은? 우리는 다른 거보다 그게 중요하잖아?”
“몰라! 은재언니가 그러는데 성격도 좀 이상했대! 결혼식에 회사 사람들도 안 불렀나 봐! 경력은 있는데 이 계통에 친한 사람도 없대!”
여기저기서 모두 한 마디씩 터졌다.
“뭐야! 그런 사람이 와도 되는 거야?”
“진짜 허수아비네!”
“일부러 그런 사람을 고른 거야?
“채경언니가 칼라 출신이라 선화부를 정말 아무렇게나 생각하는 거 같아!”
“그러게 말이야! 다른 데는 총치프가 거의 다 선화 출신인데!”
운 좋게 치프가 된, 향숙언니는 오직 통장으로 들어오는 월급에만 관심이 있었다. 누가 봐도 도대체 그 자리에 왜 앉아있는 건지 의아할 정도로 직무 몰입도가 떨어지고 책임감도 없었다.
별다른 의욕도 없이 태만한 업무 상태를 유지했던 향숙언니는 난감한 사태가 발생할 때마다 ‘아줌마니까 좀 봐 죠!’라는 눈빛으로(실제로 리테이크를 가지고 온 촬영실 기사에게 그런 말을 했던가) 비굴한 웃음을 흘리면서 상대의 눈치를 살피곤 했는데 그 민망한 모습은 여지없이 다른 부서 사람들의 시야에도 잡히곤 했다. 그때 그들의 얼굴에 스쳐 지나가는 어이없는 표정이라니!
향숙언니는 존재감이 없는 탓에 오히려 여러 사람들의 눈에 띄는 존재가 되었다.
팀원들 또한 손톱만큼도 리스펙트 할 수 없었던 향숙 언니를 어떤 얼굴로 대해야 할지 몰라 난감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우리가 말하는 존경이라는 의미는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었는데 향숙언니는 용케 그 덕목들을 죄다 비켜가고 있었다.
예를 들면, 일에 대한 전문성을 갖추고 있다든지, 성실하다든지, 측은지심이 있다든지, 순수하다거나 뭐 순진하다거나, 마음속에 촛불 같은 진심을 품고 있다든지…… 뭐 그런 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충족되면 우리는 언제든지 향숙 언니에게 존경심을 뿜어낼 자세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향숙언니는 그 어느 것에도 해당되는 게 없었다.
아무리 성격이 모나고 괴팍했던 수영언니도 일에 대한 전문성과 성실성은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의 딜레마는 불만을 드러낼 수는 없다는 데 있었다.
채경언니와 수영언니의 알력으로 시작됐지만 우리는 수영언니를 그만두게 한 원죄를 안고 있었으니까.
때로 우리 스스로에게 당부했던 휴머니즘이나 위선조차 고갈될 때가 있었다. 능력은 없었지만 육 남매 중 넷째 딸로 눈치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장착하고 살았던 향숙언니가 그런 팀원들의 태도를 모를 리 없었다.
향숙언니는 기존의 창단 멤버들이 한 작업에 대해 트집을 잡기 시작하면서 본인의 존재감을 과하게 드러냈다.
그리고 경력직으로 새로 입사한 직원들에게는 눈에 띄게 친절했고 잘해주었다.
치프가 잘해 준다는 의미는 치프 고유의 권한인 매수를 잘 챙겨준다는 것(매수가 많고 작업하기 쉬운 씬을 주는 것)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걸 입 밖으로 내색하는 사람은 없었다. 조용히 떠날 뿐이었다.
수화 씨가 전화를 받고 자리에 앉더니 나에게 말했다.
“역삼에 회사가 새로 생기는데 우리 같이 가자! 내가 너 얘기도 했어! B급으로 올려준대!”
“진짜!”
B급이라면 두 계단 승진이었다.
“이 계통이 소문이 빠르잖아! 그쪽 치프도 너 알고 있어!”
“어떻게?”
“어디서 들었겠지! 이 계통에서 제일 잘 나가는 회사에서 두 달 동안 치프 자리가 공석이었는데 그 자리를 메꾼 우리 희망이를 모르겠어!”
“미국 일이야?”
“당연하지! 일본일이면 나도 안 가! 맨날 철야에 단가도 형편없고 완전 만화공장인데… 골병들지!”
나는 수화 씨의 제안을 거절했다. 몸값을 올려준다는 제안에 솔깃했지만 그 계통에서 SBG프로덕션만큼 탄탄한 회사도 없었고 그동안 여러모로 정들었던 회사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즈음 나는 메인 애니메이션 작업에 대해 회의를 품고 있었다.
선화부나 칼라부가 하는 일에는 개인의 창의성이나 독창성이 개입될 여지가 없었다.
칼라부에서 하는 일은 선화부가 넘겨준 대로 색칠만 하는 것이었고 선화부에서 하는 일은 동화부에서 그려준 그림을 셀에 그대로 옮겨 그리거나 제록스에서 복사된 셀에 끊어진 선을 연결해 주고 타임시트에 기록된 대로 칼라에서 색칠하기 쉽게 선을 끊어주는 정도였다. 어느 정도 일을 하다 보면 기계적인 일의 반복이라 성취감은 없었다.
그동안은 새로운 환경에 대한 호기심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이제는 더 이상 새로울 게 없는 환경이 된 것이다.
나는 진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내가 이 계통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경력을 쌓아 치프가 되는 길이었지만(욕심을 부렸으면 벌써 그 자리에 앉았겠지만) 나와 기질이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내가 과연 그들과 (함께 유흥을 즐기며) 같이 어울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