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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랑비탈 Oct 14. 2023

13. 이유 있는 우연

<소설> 애니메이션 회사

나는 월말까지 근무하는 것으로 마음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권도현을 회의실에서 만나고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 전 직원에게 공지가 내려왔다.

회사가 미국의 모기업에서 분리돼 독립된 경영으로 새 출발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회사는 구조조정을 한다고 발표했고 일단 모든 직원은 사직서를 내라고 했다.

새로 출발하는 회사와 동행할 직원은 두 달 후에 개별적으로 연락한다는 것과 함께 30%의 감원설이 돌았다.

물론 나는 그동안 쌓아 올린 인사고과가 있기 때문에 그럴 리야 없겠지만 이번 기회에 그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싶었다. 더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두 달 뒤, 예상대로 출근하라는 연락이 왔지만 거절했다.

그게 나를 지키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에게 빚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고맙다는 인사는 해야겠지,라고 생각했다.     

우연히 총무과에서 본 비상연락망에서 그의 주소를 본 기억이 났다.

다음 날 아침, 출근 시간에 맞춰 나는 권도현이 살고 있는 동네에 있는 지하철역으로 가서 무작정 권도현을 기다렸다(그즈음 그가 차를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는 것을 내가 어떻게 알았을까? 그것에 대한 기억은 없다).     


한두 번쯤 열차를 보낸 뒤, 계단을 내려오는 권도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권도현을 발견한 순간 무작정 그에게 다가갔다. 그때 나는 사고 불능의 상태였다. 오직 권도현만을 바라보며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다.


그런데, 아뿔싸!

그의 옆에는 중학교 1학년쯤 돼 보이는 하얀 피부를 가진 단발머리 소녀가 있었다.

‘이 시간에 어떻게……’

예쁜 소녀는 권도현 옆에서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무구한 얼굴로 상대를 적극적으로 환대하고 있는 미소.

그리고 소녀의 옆에 있는 남자아이도 시야에 들어왔다(초등학교 3,4 학년쯤 돼 보이는 남자아이는 어린 사슴처럼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갑자기 암흑 속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그 후, 나의 행동은 발작에 가까웠다.

나는 권도현에게 가까이 다가가 다짜고짜 “지금 시간 있으세요?"라고 말했고 권도현은 당황한 얼굴로, 그러나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말투로  “지금 애들 데리고 병원에 가는 거야……”라고 말했다.     

권도현도 그 말 외에는 달리 생각나는 말이 없는 거 같았다.


엉망진창이었던 시간, 나는 얼어붙은 얼굴 그대로,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아이들은 평생 그 순간을 잊지 못할 것이다.

특히, 미소를 잃지 않고 교양 있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던 그 소녀는 말이다.

나는 종종 그 소녀의 미소를 생각하면서 타인에 대한 적극적이고 이타적인 환대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 생각과 함께 그가 불행하진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짧은 시간, 그 소녀의 밝게 빛나는 얼굴에서 내 아버지에게 받았던 사랑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편지를 썼다.

그동안 고마웠다고,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바란다고.

2년 1개월 동안 즐겁게 다닌 회사였지만, 그에게 벗어나는 일이 내가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했다.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다시 출근하라는 전화였다.

사표를 쓴 향숙언니 대신 같은 부서의 선배들을 통해서, 그리고 은정을 통해서, 또 유난히 나를 따랐던 컬러부 진행을 통해서.


전화가 올 때마다 거절했지만 그 전화는 여러 경로로 내가 제과점을 개업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꼭 누군가의 지시에 의해 부서장이 계속 연락하는 거 같았다.

권도현일까? 아니면 제작 실장일까?


한 번은 채경언니의 호출로 크라운 베이커리에서 파운드 케이크를 사들고 간 적이 있었다.

채경언니는 나에게 다시 출근하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내가 출근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가 말했다.     


“그럼 쉬고 싶은 만큼 쉬다가 언제든지 다시 오고 싶을 때, 와!”


그럴 리가 없다는 것도 그녀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여보세요?

…………


전화를 받으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전화가 왔다.

나는 오전의 밝은 햇살이 쏟아지는 거실의 소파에 앉아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으면서 혹시 권도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엄마가 쓰러졌다.

엄마는 인천의 종합병원을 거쳐 강남의 한 대학병원으로 옮겨졌다. 모든 상황이 퍼즐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만약, 내가 회사에 다녔더라면 우리 가족에게 되돌릴 수 없는 큰 불행이 닥쳤을 것이다.


엄마가 수술을 무사히 마치고 퇴원을 하루 앞둔 날, 친하게 지냈던 컬러부의 색지정 언니가 문병을 왔다.

나는 모처럼 바깥바람도 쐴 겸 언니를 배웅하려고 병동 밖으로 나왔다. 엄마가 병원에 입원한 이후로 바깥으로 나온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오랜만에 긴장을 풀고 따뜻한 햇살과 함께 상큼한 바깥공기를 마신 나는 언니와 마구 웃고 떠들면서 ㄱ자로 구부러진 인도의 경사진 곳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인도 옆 차도에서 급브레이크를 밟는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나와 웃으며 대화를 나누던 언니가 갑자기 “아악!” 비명을 지르면서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권 실장님이야!”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내가 고개를 돌렸을 때, 권도현의 차는 본관 쪽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언니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입술을 바르르 떨며 계속 중얼거렸다.


“사고가 날 뻔했어! ……그런데 여긴 왜, 왔지? 옆에 누가 있었던 거 같은데…… 사장님인가? 조슈아가 다리를 다쳤다고 하던데 여기에 있나……”


나는 서둘러 언니를 배웅하고 정형외과 병실로 뛰어갔다. 어디에도 권도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권도현은 나를 봤을 것이다.

그때, 나는 그에게 익숙한 분홍색 시스루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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