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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랑비탈 Oct 15. 2023

14. 호모사피엔스의 사랑

<소설 > 애니메이션 회사


제과점을 개업하고 1년쯤 지났을 때, 선배들의 결혼 소식이 전해졌다.

선향언니로부터 시작된 결혼식은 희재언니, 현숙 씨, 현주언니의 결혼식으로 이어졌다.

청첩 모임에서 선배들은 나에게 권도현의 안부부터 전해주었다.


“불쌍해서 못 보겠어! 아직도 너만 생각하나 봐! 어깨가 이렇게 축 쳐져서 다니는데, 우리가 지나가면 하염없이 쳐다보는 거야!”     


회사에서 친했던 사람들을 만나도 모두 한 입처럼 똑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 상황이 좀 희극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2년쯤 지났을 때, 청첩장을 주기 위해 은정을 만났다.

은정도 결혼을 전제로 사귀는 사람이 있었고, 나도 제과점에 매여 있는 시간이 길어 우리가 만난 것은 제과점 개업 이후 처음이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얼굴을 본 은정은 나를 보자마자 권도현의 소식부터 전했다.


“너가 정말 보고 싶은가 봐! 나만 보면 한참 쳐다보는데 그냥 쳐다보는 게 아니라, 내가 그 길을 다 지나갈 때까지, 그 골목 끝까지 쳐다보는데 정말 민망해 죽겠어! 나보고 어떡하라고!”


은정은 나에게 하소연하듯 말했고, 나는 가만히 웃고 있었다.

이 게임은 내가 이겼다고 생각했다, 1승 1패.

나는 벌써 그를 잊고 있었으니까!

그의 아픔은 관심 밖이었다.     

       





......세월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사랑,

그 사랑이 평생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사랑이라는 걸, 왜 몰랐을까?

평생 초라함을 잊게 해주는 사랑이라는 걸 말이다.


젊음에겐 온전한 진실이 보이지 않는다.

젊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그 나이만큼의 진실일 뿐,

진실은 시간이 쌓인 뒤에야 보인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우연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겹쳐 우리의 서사가 되었던 순간들,


……어떤 진실은 너무 늦게 보인다.





나는 아직도 그에게 내 출근 카드의 번호를 불러주었던 날을 기억한다.

기온이 갑자기 ‘뚝’ 떨어진 날, 반코트에 목도리로 얼굴을 꽁꽁 싸매고 출근한 날이었다.

내가 왜 그랬을까?

겨울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출근 시간의 체감온도는 더 낮게 느껴졌다.

잎이 떨어진 가로수들이 나의 쓸쓸한 정서를 한껏 부추겼다. 그것은 마치, 내가 가을을 떠나 겨울의 유배지로 들어선 느낌이었다.

누구에게든 말을 걸고 싶었다.

겨울의 한 복판에서―유배지에서―사람의 체온을 느끼고 싶은 충동 말이다.


내가 “37번”이라고 크게 소리쳤을 때, 그는 어둠 속에서 구멍이 뚫리고, 그 뚫린 구멍으로 빛이 환하게 쏟아져 들어온 것처럼, 눈부신 표정이었고 그의 얼굴은 즐거운 비밀로 환호하고 있었다.

그와 나의 존재만으로 꽉 채워진 시간, 그것은 신이 살아있는 자에게 축복처럼 안겨준 찰나의 선물이었다.

사람은 이런 기쁨에서 벗어나는 공포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는 게 아닐까.


그때, 권도현은 나에게 무엇을 보았을까?

아니, 그전에 나에게 무엇을 보았기에 아침마다 내 작업실의 방문을 열어보았던 것일까.

자신의 옛 모습을 그리웠던 것일까?

돌아갈 수 없는 순수의 시간,

아침에 눈을 뜨면 따뜻한 온기를 지닌 희망의 메시지가 머리맡에 달걀 꾸러미처럼 한 바구니씩 배달되는 시간 말이다.


권도현은 나를 통해 잃어버린 시간을 찾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가 나를 바라본 것은 잃어버린 자기 자신을 찾고자 하는 열망이 아니었을까?

아니, 모든 사랑은 자기 자신을 찾고자 하는 본래적 실존에 대한 열망일 것이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누구보다 나를 사랑한 사람은 권도현이었다고.

그의 운명의 코드는 순수였다.

그를 처음 봤을 때, 스물두 살 가을, 내 피의 색깔은 순수였고 그런 것이 깃발처럼 펄럭일 때였다.     






                        에필로그     

  


그였다.

권도현이었다.

푸른색 입구를 지나 밝은 아이보리 색으로 칠해진 벽으로 시선을 옮겼을 때,

한눈에 권도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뜨겁고 묵직한 것이 가슴에 ‘퍽’하고 파고들었다. 익숙한 그의 시선 때문이었다.

돌돌 말린 필름처럼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시선, 그 시선은 깊고 우울했지만 언제나 애틋함을 담고 있었다.


나는 오감을 집중시켜 천천히 그의 얼굴을 뜯어보기 시작했다.

숱이 있는 반백의 머리에 살짝 그늘진 얼굴, 내려간 입꼬리가 그의 기품 있는 얼굴을 훼손시키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꾹 다물고 있는 입은 그가 오랫동안, 침묵 속에 있는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그를 떠나 있었던 시간이 찰나처럼 느껴졌다.




……최근 우연히 방문한 애니메이션 박물관에서 그의 사진을 발견했다.

국제 애니메이션 행사에서 기념촬영을 한 사진, 생각지도 못한 조우였다. 이렇게 그의 안부를 확인하게 되다니! 나는 그에게 인사했다.



  고맙습니다잘계시지요잊지않겠습니다*



       




완벽한 이별은 망각뿐이다.

                




*(멕시코 문화에서는) 죽은 후에, 이승의 누군가가 기억해 준다면 그의 영혼은 소멸하지 않는다고 한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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