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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랑비탈 Oct 13. 2023

12. 헤어질 결심

<소설 > 애니메이션 회사

나에게도 변화가 필요했다.

그와 멀어지는 변화,

매일 그와 부딪치는 생활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영락없이 그에게 기대서 사회생활을 하는 꼴이었다.

그러나 내가 회사에서 그를 피할 길은 없었다.


2층에 있던 편집실이 1층으로 옮겨왔는데 편집에도 관여했던 권도현은 그곳을 수시로 왔다 갔다 했다.

나는 화장실에 갈 때마다, 밥을 먹으러 갈 때마다 권도현과 부딪쳤다.


그런데 그렇게 스치듯 지나가면서도 우리는 대화를 나누었던가?

무언의? 조용한? 아니, 사랑을 나누었던가?

서로 고개를 숙이고 말없이 지나쳤지만 공기조차 두 사람이 뿜어내는 기대와 떨림으로, 밤꽃이 핀 봄밤처럼 축축하고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때 우리는 잠시의 순간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서로를 응시하면서 마음을 비비고 서로의 존재를 쓸어내리며 탐했던 거 같다.

그러면 그에게 위안이 되었던가?

그렇게 그를 스쳐 지나간 날이면 나도 긴 시간 그와 같이 있었던 것처럼, 알 수 없는 기쁨으로 들떠 있었다.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그의 얼굴이 보인다.

숙연했던, 그리고 기다림에 이골이 난 체념하지 못한 슬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가장 낮은 자리에서 나를 향해 온 신경을 모으던 표정, 그리고 조용히 내 옷 섶을 젖히고 내 가슴에 가만히 귀를 대고 심장소리를 듣는 거 마냥, 거친 숨소리를 죽이던 고요한 모습, 자신의 화려함을 잊고 겸손한 눈빛으로 나를 지켜보던 남자의 얼굴.


나는 그의 사랑에 중독되지 않으려고 몸부림쳤다.

그에게는 나 이외의 다른 세계가 있을 터이니. 나는 이 사랑의 피해자가 결국 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도망치기 바빴지만, 결국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


어느 때부터인가 나를 지켜보는 그의 눈길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희망을 줄 수 없는, 그러나 쏟아버릴 수 없는 감정들. 눈빛에는 고통이 잔잔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행위는 그를 위한 기도, 그를 아픔으로 바라보는 행위일 것이다.

내가 이 상황을 즐기는 것은 신이 허락할 거 같지 않았다. 떳떳하지 못하게 느껴졌다. 그와의 관계를 계속 붙잡고 있을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그를 이용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날도 손을 씻으러 나오다 권도현과 부딪쳤다.  

나는 “실장님!” 하고 그를 불렀다.

아주 작은 소리였는데 그는 분명하게 알아듣고 내게 고개를 돌렸다.


내가 그에게 무슨 말을 건넨 건…… 내 출근 카드의 번호를 불러준 이후 그때가 처음이었다.     


“시간 있으세요?”     


그는 이미 그런 상황을 여러 번 상상했을까? 내가 만나고 싶어 할 때가 있을 거라고.

밖에서 만나는 걸 기대했던 나에게 권도현은 복도 끝에 있는 회의실을 가리키며 다정한 말투로 천천히 말했다.     


“이따 두 시에 저기 회의실로 와.”     


자연스럽게 들리는 말투였지만 뭔가 스스로 잔뜩 억제하고 있는 게(그에게서…… 엷게 물든 무엇이 꽃잎처럼 바닥에 몇 장, 후드득, 떨어졌다) 느껴졌다.

그런데 내 표정이 안 좋았던가?

권도현이 갑자기 초조한 얼굴로 빠르게 말을 이었다.


“거기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아! 들어오는 사람이 없어! 우리 둘 뿐이야! 걱정하지 마!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는 언제나처럼 나에게 “걱정하지 마!”라고 말하고 있었다.     


작업실에 들어와 책상 위에 쌓인 일들을 하기 시작했다.

첫 만남의 장소가 고작 회사 안의 회의실이라니!

내심 낭만적인 만남을 고대했었나?

나는 당장 약속을 파투를 내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내가 회사 안에서 그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어떤 게 있을까?

나는 차인 기분으로 그걸 곰곰이 생각했다.     




1층 회의실은 처음 가보는 곳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무도 없는 회의실 일부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소강당 크기의 흰색 공간이 반으로 나뉘어져 검은색 암막 커튼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 암막커튼은 양쪽으로 내려져 단정하게 묶여 있었다.

그리고 불이 켜져 있는 커튼 안쪽에 커다랗고 긴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감독들이 그곳에서 필름을 보면서 작품에 대한 논의를 하는 것 같았다.


권도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는 빛이 뿌려지고 있는 검은색 암막커튼과 테이블 사이에 주춤거리고 있었다.

그가 테이블 쪽으로 걸어오면서 내 앞에 있는 의자를 살짝 꺼내 주었다.

순간, 권도현의 얼굴이 조금 붉게 물든 것이 시야에 들어왔지만 마음이 닫힌 나는 그가 내어준 의자에 앉지 않고 그 옆에 있는 의자를 꺼내 앉았다(그는 나의 거절이 익숙한 것이어서 그다지 마음을 쓰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초조하고 조심스러운 눈빛에 표현하지 못한 상실감이 잠시 절망으로 나타났던 것 같다).


내가 앉는 걸 보고 권도현이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나는 성의없는 목소리로 담담하게 말했다.     


“동화를 하고 싶어요.”


다른 얘기를 기대했을까, 우리들의 이야기를.

그의 눈에서 쏟아진 실망의 빛이 다른 곳을 향한 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권도현은 침착했다. 부드럽게 그리고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왜, 나에게 부탁할 생각을 했지?”  


여전히 나는 그를 쳐다보지 않고 존대어를 쓰지 않은 채, (이 개 같은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바라면서) 귀찮은 듯, 심드렁하게 말했다.


 “아는 사람이 없어서!”


그때 누군가가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입구 쪽에 있는 장식장에서 부스럭거리면서 뭔가 꺼내는 소리가 들렸다. 총무과 직원인 거 같았다.

권도현이 고개를 빼고 소리를 질렀다.     

“야! 나중에 와서 해!”     

직원이 나간 뒤, 그가 나의 시선을 집요하게 좇으며 다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나에게 부탁할 생각을 했지?”     


나는 지루한 듯, 똑같은 대답을 (역시 그를 쳐다보지 않고) 성의 없이 반복했다.


“아는 사람이 없어서.”     


그에게는 아주 익숙한 홀대였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권도현이 말했다.     


“그럼 다른 회사라도 괜찮아?”     


‘뭐야? 이 시키가 날 딴 데로 보내버릴 작정인가?’

그때, 또 다른 남자직원이 들어왔다.

이상한 날이었다.

그동안 회의실에 총무과 직원들이 드나드는 것은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누군가가 계속 사람을 보내는 것 같았다(흥분한 권도현이 여우 같은 총무과장에게 발설하고 온 건 아닐까?).

권도현이 조금 화가 난 듯 직원에게 다시 큰 소리로 말했다.     

“야! 조금 있다가 해!”     

총무과 직원이 나가자 그가 다시 부드럽고 신중한 말투로 말했다.     


“다른 회사라도 괜찮아?”     


“아니!”     


침묵이 흘렀다.

권도현과 나의 관계는 많은 사람들이 인지하고 있었지만 누구도 우리의 관계에 대해 입 밖에 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내가 부서를 옮긴다면 사내에서 우리들의 이야기는 다른 방향으로 폭발할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그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갈 수밖에 없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화가 났기 때문이었다.     


“다른 말은?”     


“…………”     


“나한테, 다른, 할 말은 없어?”     


“…………”     


나는 권도현의 집요한 시선을 피했다.

권도현은 지쳤고, 모든 걸 포기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애써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할 말 없으면 그만 일어나……”     


나는 끝내 그에 대한 빗장을 풀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 섭섭한 분노 같은 것이 스쳤다.

권도현은 내가 자신을 농락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나에게 받았던 많은 부정적인 신호를 기억할 것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게 다 네 탓이야!’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입구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던 내가 먼저 문 앞에 다다랐다.

손잡이를 잡고 문을 조금 열었을 때, 키가 큰 그가 성큼성큼 다가와 철문의 위쪽을 잡아주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나가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경건한 의식에서 온몸으로 사랑을 느꼈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작업실로 들어왔다.

나도 한 번쯤, 그렇게 따뜻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으면 좋았을 걸 말이다.




사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그를 봐야 할 것 같아서 만나자고 했는데, 그와 나 사이에 지뢰밭처럼 깔린 감정선을 건드리면 걷잡을 수 없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영혼의 떨림과 끌림,

나는 그의 눈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무의식의 흐름을 (따라간다면 그곳에 우리들의 세상이 존재하겠지만) 그대로 따라갈 수 없었다. 스물네 살의 이성으로 제어할 수 없는 또 다른 세계가 그와 나의 현재를 초토화시킬 것 같았다.                  


권도현도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일까?

그래서 회사 안에서 만나자고 했던 것일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이제는 권도현이 선긋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들의 미래를 생각했을 때 그건 현명한 판단이었지만 나는 이 어긋남이 조금 슬프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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