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직한 성장에 대한 작은 생각
"다 큰 애가 아직도 그러고 있으면 어떡하니? 그정도 컸으면 이제 어른답게 현실을 생각할 줄도 알아야지."
"아직 너는 클라면 멀었지. 네 나이에 인생을 뭐 많이 겪어보기나 했겠니?"
불과 최근 일주일 사이에 내가 들었던 말들이다. 정확히 모순되는 두 말 속에서 내 위치를 고민했다. 나는 지금 어른인가, 아니면 아이인가? 아직 완벽히 한 쪽으로 기울지는 않은 중간자라면, 그나마 어디 쪽에 가까운거지?
10대 때 내가 가진 어른의 이미지는, 웃기게도 술이었다.
멋지게 국민의 일원으로서 투표권을 행사한다던지, 직장을 가져 자신의 커리어를 쌓아나간다던지, 새벽에 클럽에서 밤새 논다던지, 아니 심지어 연애를 하면서 자유롭게 모텔을 드나든다던지 하는 모습들이 아니었다. 나에게 어른을 단 한 가지의 이미지로 표현하라고 하면 초록색 소주병이었다. 혹은 카스 로고가 붙은 맥주캔이거나.
그래서 나는 중고등학생 때 술을 먹는 걸 정말 싫어했다. 주위에선 오히려 술을 입에 안 대본 친구가 더 적을 정도로 다들 술 경험이 있었다. 한 번쯤은 먹어봐도 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 법도 했지만,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담임선생님이 반 아이들에게 딱 한 잔씩만 주는 거라며 주는 술도 받지 않았다. 나는 아직 어른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술은 어른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에. 집에서 부모님이 주시는 술도 당연히 받지 않았다. "난 아직 어른이 아닌데 술을 왜 줘?"라고 반문할 뿐이었다. 아빠가 주는 술은 괜찮아, 라는 말을 들어도 고개를 절레절레. 나는 어른이 되면 술을 마실 거야.
술을 마실 수 있다는 건, 술을 마신다는 건 내가 어른이 된다는 가장 큰 상징이었다. 아이와 어른의 경계선을 긋는 건 다름 아닌 술이었다.
막상 대학교에 들어와서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처음 술을 마셨는데 별 거 없었다. 맛도 없었을 뿐더러 다음 날 숙취 때문에 머리가 아프고 속이 안 좋았다. 딱 하나, 내가 어른이 되었다는 게 기분이 좋았다. 처음으로 술에 가득 취한 날 집에 와서 '난 이제 어른이야.'라는 마음으로 침대에서 쓰러져 실실거리며 웃었던 기억이 난다.
'어른 = 술을 마실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정의가 새로 쓰이기 시작한 건 꽤 최근의 일이다.
요새 들어 그동안 하지 않았던 생각들을 하기 시작했다. 뉴스와 책으로 접한 수많은, 정말 '수많은'이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고, 생각을 나눈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그것들을 기록한 일기장이 있었다. 자기 전에 그걸 다시 펼쳐보고 뜬 눈으로 불꺼진 천장을 바라보며 고민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짧지 않았던 흐름 속에서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리해 나갔다.
지금 누가 나에게 "어른이 뭐야?"라고 묻는다면 나는 아마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타인의 불행과 고통에 완전하게 공감하고 그들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 어른이 된다는 건 그런 사람이 된다는 것.
하지만 그게 진짜 가능할까? 내가 아닌 타인의 입장에 몰입해서 그들을 이해하는 게?
그들의 편에서 이야기하고, 이야기를 통해서 그들을 사랑하게 되는 그런 과정이 진짜로 가능할까?
아니 불가능.
절대로.
김연수 작가의 소설 <원더보이>에 나오는 주인공 정훈이라면 모를까, 죽었다 깨어나도 그 사람의 마음을 온전히 똑같이 느끼는 건 불가능하다. 얼마나 슬플까, 안타까울까, 힘들겠다,라고 내 경험과 상상에 빗대어 추측만 할 뿐이다. 어떻게 당사자만큼 힘들 수 있을까. 그래서 우리는 완전한 상태의 어른이 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어른을 꿈꾸는 게 무의미하다는 건 아니다. 불가능한 상태를 추구하는 것이 곧 무의미를 뜻하는 건 아니기 때문에.
완벽한 상태의 민주주의는 실현시키기가 불가능하다. 모든 사람이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민주주의 사회를 추구하는 게, 누구나 행복한 사회를 추구하는 게 무의미하지는 않다. 그걸 이상향으로 잡고 나아가는 과정에서 충분히 유의미한 결과물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불가능하지만 우리가 그걸 포기하지 않는 건, 중요한 것이 결과에 있는 게 아니라 그걸 추구하는 과정에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다. 결국 어른이라는 건, 타인의 고통과 불행과 슬픔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인간상을 이상향으로 두고 그렇게 되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 귀 기울여 어딘가에 숨겨진 소외된 목소리를 찾아내고, 듣고, 같이 울고.
마치 무지개를 향해 나아가듯. 파랑새를 찾아 걷듯. 우리는 어쩌면 환상일지도 모르는 '어른'이라는 종착점을 향해서 걸어야 한다. 죽는 순간까지 걸어도 절대 도착 못할 곳을 향해서 말이다. 그 길 위에서 인간다운 삶의 열매가 핀다. 그 열매를 먹으며 우리는 성장한다. 그렇게 점차 어른에 가까워진다. 나에게 진정한 어른이란 그런 거다. 진정한 의미의 성장이란 그런 거다.
"나는 내 고통에 관해서만 맹렬하게 생각하고 있었을 뿐, 저기 분명한 고통에 관한 것은 생각해보려고 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 잊지 마. 내가 이렇게 아플 수 있으면 남도 이렇게 아플 수 있다는 거. 제대로 연결해서 생각해야 해. 그런데 이렇게 연결하는 것은 의외로 당연하게 일어나는 일은 아닌지도 몰라. 오히려 그런 것쯤 없는 셈으로 여기며 지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는 정도인지도 몰라. 그러니까 기억해두지 않으면 안돼. 안 그러면 잊어먹게 되는 거야. 잊으면 괴물이 되는 거야." - 황정은, <계속해보겠습니다>
나는 지금 얼마나 어른에 가까워졌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