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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수 Sep 03. 2017

낡은, 그리고 낡고 있는

오래된 것들에 대한 단상

#1.


- “이 동네에서 오래 사셨나 봐요?”
- “중간중간 잠깐 다른 곳에 살았던 거 빼면 5살 때부터 이 나이 먹도록 여기서 살고 있네요.”
- “좋은 곳인가 봐요 여기?”
- “아유, 뭐가 좋아요. 먹을 것도 없고 볼거리도 없는데.” 

 

 집 근처에 으리으리한 우동집이 새로 생겼다. 번화가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먼 동네에 어울리지 않는 가게다.
 엄마가 어제 이 집으로 우동을 먹으러 갔다. 동네 입주민이 된 사장님과 토박이 주민인 엄마는 짧은 대화를 주고받았더랬다.


- “그럼 다른 데로 가시지 않구요.”
- “글쎄요. 음, 이 동네에서 같이 자란 사람이랑 결혼해서 살고 있으니까?”
- “하하 로맨틱하시네요.”
- “그리고 동네가 점점 변하는 걸 보면 재밌잖아요. 이런 우동집 생긴 것도 그렇고. 시간 참 잘 가요. 그쵸?”



#2.


 문래동에서 집까지 걷는 늦은 오후였다. 적갈색 벽돌로 지어진 거대한 건물 옆을 지나가다가 엄마가 말했다.


- “이 건물 엄마 다섯 살 때도 이대로 있었다? 그때 이 동네 물난리가 진짜 많이 났었는데 그때마다 여기 2층으로 피난 왔었어.”
- “그때 건물이 아직까지 안 무너지고 잘 있네. 이 옆엔 큰 볼링장 있지 않았나? 나 애기때. 그거 없어졌나 보다 엄마.”
- “없어진 지 꽤 됐어. 그 건물 생기기 전엔 놀이터였는데 거기서 어렸을 때 참 많이 놀았는데.”
- “그럼 얘는 왜 아직까지 살아있는 걸까?”



#3.


 제천에서 아빠가 밤을 새고 오늘 올라왔다. 친구 아버지의 장례식이었다고 했다.
 저녁이 다 되어서야 돌아온 아빠 얼굴엔 주름마다 지친 기색이 촘촘히 박혀있었다. 들어오자마자 아빠가 한 말은 다른 말도 아니고 ‘배고프다’, 였다.


- “거기서 뭐 안 먹었어요?”
- “응 쫄쫄 굶었다 야”
- “왜 안 먹고 몸 상하게!”
- “너희 아빠 원래 상갓집 가면 음식 안 먹어.”


이유를 따로 묻진 않았지만 왠지 알 것도 같았다.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는 곳에서 나온 음식. 그 기운을 멀리 하고 싶으셨던 거겠지. 시간이 다 가버리면 그 끝에 맞이하는 모습이 나에게 담기는 걸 피하고 싶으셨던 거겠지.



#4.


 시간이 지나가면서 변해가는 모습은 다양하다. 어떤 것들은 세상에서 아예 사라져 버리기도 하며, 모습을 아예 바꿔 다시 살아나려고 하기도 하고, 굳건히 제 모습을 지켜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게 어느 쪽이든 세월이 흘라가는 걸 바라보는 건 썩 유쾌하지 않다.


 늙어가는 게 사람이든 동네든 그 외벽엔 금이 가기 마련이다. 푸릇함은 시들어간다. 원래의 아름다움은 어디론가 가버린다. 사라져 버리면 상실의 슬픔이, 바뀌려는 노력엔 연민의 슬픔이, 굳건한 모습엔 언젠간 무너질 거라는 불안의 슬픔이 따른다.


 뭐가 됐든 나는 낡을 수밖에, 그래서 슬플 수밖에 없다면 어쩌나.


 유년의 추억은 머릿속 주름마다 차곡차곡 쌓여간다고 할머니가 그랬는데. 그래서 나중에 치매를 앓아 기억을 다 잃어도 어렸을 때 기억만큼은 남아있는 거라고 그랬는데.


 나의 지금이 늙지 않는 유년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죽는 순간까지 지금의 나날을 기억하며 슬픔 속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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