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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야 Aug 22. 2020

단편 영화 <간호중>

‘인간다움’은 얻는 것인가 잃는 것인가.

<간호중>

2020, 민규동 감독


*이 작품은 현재 wavve라는 플렛폼을 통해 스트리밍을 할 수 있으며,

SF8이라는 프로젝트로 MBC를 통해 방송되는 8개의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SF 장르를 기반으로 한 이야기를 마주하게 되면 기대와 걱정이 동시에 발생한다. 전자의 경우는 미래라는 상황에서 어떤 설득력 있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보여줄지에 대한 기대일 것이고, 후자의 경우는 그간 보아온 같은 장르 속에서 몰입을 방해하는 설득력 없는 요소들에 대한 걱정이다. 그리고 그게 한국 영화라면 기대보다는 걱정이 조금 더 앞서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일종의 프로젝트로써 시작한 이 <간호중>과 같은 설정의 작품들을 보면 일반 상업영화보다 비용적인 부분에서 부족한 것이 사실이기에 애써 미래의 모습을 보여주려 시도를 하다, 자칫 언급했던 것처럼 몰입을 방해하게 된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작품 속 미래의 병원이라는 공간에서 대부분의 관객이 아파트로 인식할 수밖에 없을 병원 복도의 모습이 바로 그 요소이다. 몇몇 영화와 드라마에서 보았던 그 공간이기에 더욱 그렇다.  


 또 다른 것은 간병인 로봇의 모습이다. 보호자와 간병인 로봇이 같은 모습, 즉 같은 배우가 연기하며 분장을 통해서 그 외적인 비교로 인해 한쪽이 로봇이라는 점에서 좀 더 설득력을 갖지만, 같은 배우라는 그 사실 자체를 통해 관객의 몰입은 미세하게라도 방해받는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이러한 일종의 단점들을 과감하고 영리하게 방어한다.


출처 - MBC

 앞서 말한 아파트로 보이는 병원 속 공간 미술의 경우를 보면, 정길(염혜란)이 간병인 로봇의 문제점을 말하러 갈 때 이 작품은 끝도 없어 보이는 상층부부터 지하 1층까지를 수직으로 보여주며 하강해,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을 비추며 이 공간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덕분에 우리는 한 층으로만 한정된 듯했던 이 공간과 같은 상황이 수없이 이어진다는 것을 알게 될 뿐 아니라, 낙하의 이미지를 발견하며 인물의 운명을 추측하게 된다. 또 다른 카메라의 움직임 역시 흥미롭다. 보호자와 간병인 로봇이 같은 배우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 기본적인 오버 더 숄더(OS)샷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대신, 빠르게 카메라를 움직이며 두 컷 사이의 이음매를 없애거나 인물의 단독 샷을 사용해 몰입도를 유지한다. 그러나 이것은 기술적인 부분일 텐데, 이 작품의 성취는 분명 이러한 요소들뿐만이 아닐 것이다.


 전체적인 이야기 구조 역시 이 작품은 경제적이고 영화적으로 드러낸다. 주인공인 연정인(이유영)과 간호중(이유영)을 소개한 뒤, 옆 병실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정길과 그 남편의 이야기, 일종의 치매 증상을 앓고 있는 남편을 위해 그녀는 많은 빚을 내서 간병인 로봇을 들인다. 그러나 남편의 증상은 호전되지 않고 정길의 건강마저 악화된다. 그리고 정길은 남편과 자신의 모습을 한 간병인 로봇이 바로 옆에 있었음에도 생을 마감하고 만다. 어딘가에서 봤을 법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메인 플롯이 아닌 이 이야기를 통해 보호자의 모습을 한 간병인 로봇, 환자보다 보호자가 먼저 죽게 되는 상황과 같은 이러한 흥미로운 요소를 통해 설명적이거나 지루하지 않고 전체 이야기의 긴장감을 더하는 동시에 연정인이 자살을 시도하는 것에 설득력을 더한다.


출처 - MBC

 또한 같은 모습을 한 보호자와 간병인 로봇이라는 설정은 단순함을 넘어서 보인다. 처음 연정인과 간호중이 등장할 때, 연정인은 엄마의 오줌 빼내는 소리를 더 이상 듣기 싫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일을 처리하는 것은 그녀의 모습을 한 로봇 간호중인다. 가족이지만 환자로서는 간병할 수 없는 이들, 결국 간병인 로봇이 보호자의 모습을 하는 것은 보호자들의 죄책감을 덜기 위한 해결책 또는 방어기제로서 설득을 갖는다. 그리고 옆 병실의 경우와 같이 ‘간병인’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음에도 로봇이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한 보호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상황을 보여주며, 결국 그 죄책감은 환자만을 위한 것일 뿐 보호자 자신은 돌볼 수 없는 아이러니 함까지 드러낸다. 그리고 이러한 흥미로운 부분은 이 작품이 하고자 하는 진짜 이야기의 기반을 마련한다.


 연정인은 간호중을 들이면서 동시에 자신까지 돌봄 대상으로 설정한다. 두 명의 환자, 우선시 되는 진짜 환자와 표면적으로 건강해 보이지만 더 고통스러운 연정인 사이에서 로봇인 간호중은 딜레마에 빠진다. 앞서 보여주었던 정길의 상황에서 설정 하나를 더 추가했을 뿐이지만, 영화는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설득력까지 갖는다. 이런 갈등을 통해 이야기는 좀 더 긴장감을 증폭시키고, 간호중이라는 객체로 인식되는 로봇이 주체적인 고민과 판단의 과정을 시작하며 관객은 자연스럽게 같은 고민에 빠진다. 게다가 만약 간호중이 연정인의 엄마를 계속 살리기로 선택한다면 같은 이야기의 반복이지만, 다른 선택으로 방향을 돌리며 또 다른 담론으로 관객을 안내한다.


출처 - MBC

 결국 간호중은 연정인을 선택한다. 이 선택이 옳고 그르냐에 대해서는 좀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한 것이 사실이지만, 이 선택은 기본적으로 로봇의 선택이기에 그 과정에서 많은 고민과 갈등이 있어도 그 결과에 대한 논란을 최소화시키며 좀 더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 있는 여지를 만든다.(선택 직전에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작품들을 우리는 수없이 보아왔지 않은가.) 그리고 그 선택에 도의적 책임을 느낀 사비나(예수정)는 시간이 지나 연정인을 찾는다.


 두 사람의 대화의 순간, 사비나가 간호중에 대해 묻자 연정인은 대답한다. “모르죠, 제가 그 로봇 새끼 지키는 사람이에요?” 아벨에 대해 묻는 신에게 답하는 카인과 같다. 다소 노골적인 모습을 띠고 있지만, 이 작품이 좀 더 밀고 나아가려는 이야기를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성경 속 형제는 이 작품 속에서 계속 언급된 자매(연정인과 간호중)로 이어지고, 로봇으로만 존재했던 간호중은 동시에 인간의 존재로서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꿈속에서 연정인을 봤다며 간호중에 대해 묻는 사비나는 신의 위치에 있는 것인가.


출처 - MBC

 신이 아벨의 목소리를 듣듯, 사비나는 해답을 찾으려 간호중을 만난다. 누워 있는 간호중, 정말 인간이 된 듯 생각하고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보이는 그녀는 사비나에게 자신을 죽여달라 호소한다. 그러나 신의 위치에 있는 듯했던 사비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아무리 그래도 누워 있는 간호중은 인간이 아닌 로봇이지 않은가.


 사비나의 말처럼 1년이 지난 후 연정인의 모습은 병원에서 고통받는 모습과 많이 달라 보인다. 결국 간호중의 선택이 옳았던 것일까. 카인이 동생인 아벨을 죽인 이유는 일종의 질투로 판단할 수 있다. 그리고 연정인이 간호중에게 해를 가한 것은 같은 감정이라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녀가 사비나 앞에서 지난 고통스럽던 10년과 (표면적으로라도)다른 삶을 살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순간, 인간인 연정인이 하지 못한 (적어도 이 작품에서는)옳은 선택을 간호중이라는 로봇이 했음이 드러나고, 이것은 ‘인간’의 질투로 발현된다.


출처 - MBC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은 인간이다. 로봇을 만든 창조자의 위치에 선 것도, 마치 신의 위치에서 질문하는 것도 인간이지만, 선택의 순간 앞에서 딜레마에 빠져 허우적거릴 뿐이다. 간호중은 잠시 딜레마에 빠져 창조자의 위치에 있는, 신의 목소리를 듣는 듯한 사비나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스스로 선택하며 인간의 나약함까지 닮지 않는다. 인간이 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는 사비나와 같은 ‘인간’은 위선자일 뿐 이들은 어떤 선택도 하지 않으려 한다.


 정말 인공지능은 인간이 될 수 없을까. 감정이 없어서? 깊게 사유할 수 없어서? 어쩌면 가장 큰 이유는 인간이 가진 나약함을, 그들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들’이 ‘우리’가 되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얻어야 하는가, 아니면 잃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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