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평상

순한 숟가락

by 햇쌀

평범한 기운이 깃든 공간. 평범한 것 같은데 특별함으로 기억되는 사물. 이런 것과의 인연은 자신을 성장시켜나갈 돌파구가 된다.

절 마당에서 초제를 위한 영정사진을 들고 있으려니 옛집 널평상이 떠오른다. 너무 평범해서 무료해 보인다. 하지만 그 좁은 공간에 삶의 운치와 여유와 지혜가 모두 살아 있었다.

“삐걱”

대문을 밀고 그 공간으로 잠시 들어간다.

나는 어느 여름날 오후 한가운데에 서 있다. 엄마가 널평상에 앉아서 강낭콩 껍질을 벗기며 누군가와 대화하고 있다. 눈길을 따라가 보니 마루 밑에서 누렁이가 능청스럽게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

“어험.”

아버지가 헛기침하며 방에서 나온다. 저녁때를 알리는 소리다. 엄마가 부엌에서 감자를 한 바가지 담아 내왔다. 모지랑숟가락이 꽂혀있다.

“북북북”

묵묵히 제 살 깎아가며 맡겨진 소임을 다하고 있는 숟가락. 그 숟가락이 내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싫지 않다. 아버지는 바구니를 받아서 익숙한 동작으로 콩 껍질을 벗긴다. 지병으로 점점 관절이 굳어가는 오른쪽 손을 왼손 아래에 보조 삼아 바치고, 왼손 엄지와 검지로 콩 꼬투리를 누르자, 꼬투리가 툭 벌어지며 풋풋하게 윤기 나는 콩알이 불편한 오른 손바닥에 떨어진다. 그러면 다시 왼손으로 오른 손바닥의 콩을 집어 소쿠리에 한 알 한 알 정성껏 담았다. 능숙한 왼손 놀림 뒤에 숨어 있는 피나는 땀과 눈물이 보인다.


나는 삶의 힘든 보퉁이를 들고 불쑥 부모님을 찾았다. 두 분은 종달새처럼 종알대는 내 말을 경청한다. 표정으로 봐서는 세상 기분 좋은 노래라도 듣고 있는 듯했다. 나는 간단히 풀어놓을 수 없는 무거운 보퉁이를 꿀꺽 삼켰다.

누렁이가 자기도 끼워 달라는 듯 평상 곁으로 왔다.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자 두 눈을 끔뻑이며 꼬리를 살랑인다. 사람의 손길을 아는 녀석이다. 녀석의 늘어진 품새를 바라보고 있자니 긴장된 근육이 다 이완되는 기분이 든다.


아무 걱정 없이 가족의 시선이 닿는 곳에 평화롭게 누워서 눈을 지그시 감고, 감자 깎는 소리를 듣고 사는 녀석의 단순한 행복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인간이 결코 누릴 수도 넘볼 수도 없는 신선의 경지 같다. 복잡한 인간은 끝없이 욕심내고, 상반된 욕망으로 상처를 주고받으며 살아가기 마련인가.


나는 퍼온 된장을 뚝배기에 풀어서 강된장을 끓였다. 밥 짓는 김 냄새와 된장 냄새가 잘 어우러져 비어 있는 위장을 자극했다. 강낭콩과 감자를 푹푹 꺼서 뒤섞은 밥에 강된장을 쓱쓱 발라 먹으니 세상의 느끼함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 나는 그날 저녁, 누렁이, 강낭콩, 숟가락, 감자, 갓 지은 밥, 강된장에서 그 어떤 위안도 받지 못했다. 오히려 나는 지금 힘들어 죽겠는데 ‘이런 사소한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일까?’라는 사실을 재차 머릿속에 떠올렸을 뿐이었다. 다만 나는 밥이 목구멍에 넘어가기까지의 그 일련의 과정들에서 가슴으로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뉘엿뉘엿한 저녁 해를 등에 지고 오붓하게 콩을 까고, 감자를 담아와 숟가락으로 북북 껍질을 벗겨서, 쌀을 씻어 밥을 안치고, 강된장이 보글보글 끓자 김치 한 포기를 썩썩 썰어, 소박한 밥상을 차려서, 널평상에 둘러앉아 말없이 밥을 먹고, 붉게 노을 진 하늘을 바라보며 구수한 숭늉을 마시던, 그 일련의 과정에서 문득 느꼈다.

“사는 게 별거더냐. 밥 먹고 살면 되지.”라는 엄마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엄마는 딸이 짊어지고 온 보퉁이의 무게를 짐작하셨을 게다.


매일 반복되는 삶에 지쳐있다 하더라도, 절망적인 삶에 부딪혔다고 하더라도, 삶의 밑바탕에 평범한 가치와 소통할 수 있는 통로가 있다면,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것이 시련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유세차···.”

제문(祭文)의 첫머리가 시작됐다. 널평상 위에 높이 쌓아 올린 풍성한 과일과 음식이 참으로 낯설다. 향이 피어오른다. 수북하게 올라간 하얀 쌀밥에서 무럭무럭 김이 피어오르는 것 같다. 제단에서 빙긋이 미소 짓고 있는 엄마를 아버지가 부른다.


“어험!” 헛기침 소리. 그곳에도 널평상이 있을까. 내가 지금까지 용케도 시련의 고비를 잘 넘겨 왔다면, 내가 잘나서가 아니다. 그것은 알게 모르게 평범한 가치를 나누어 준 주변에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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