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날이 있다. 정말이지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걱정들이 슬금슬금 기어오르려 하는. 어깨와 허리에 파스를 붙여도 뻐근하고 불편한, 바로 그런 날이 오늘이었다. 아파트 근처를 몇 바퀴 돌아봐도, 가시지 않는 머릿속 생각들에 기분이 점점 내려앉았다. 생각을 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자꾸 생각이 든다. 내가 원하는 것은 힘들 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겠다는 거였지만 명절이 다가오면서 자유롭지 않은 감정들이 생각을 하게 한다.
나의 자리, 며느리와 딸의 자리, 가족들의 감정, 코로나로 인해 지방인 시댁을 가야 하는지 아닌가에 대한 이야기를 남편과 직접 나누지를 못했다. 시댁에 대한 이야기는
늘 예민하고 조심스럽다. 가라고도 가지 말라고 할 수 없이 남편에게 맡겨 놓았지만 편치 않다. 한 달 동안 친정엄마의 일로 내가 집을 비울 때마다 고생을 감수해준 남편이기에 다가오는 명절이 더 무겁게 느껴진다. 싫은 내색 한번 보이지 않는 남편 때문에 시댁에 불편했던 마음들을 지닐 수도 없게 되었다.
나는 분명 화가 나고 상처 받았고 그 마음은 쉽게 풀고 싶지 않았다. 힘들었지만 내 마음을 내가 바라봐 준 후야 그나마 조금씩 편해지고 있었다. 그래도 내게 시간은 필요했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변수, 친정엄마의 일로 쫓아다니게 되면서 나의 화났던 마음을 가질 수도 없게 됐다. 나도 한 번쯤은 화난 마음을 가지고 있고 싶었다. 당장 마음을 풀고 싶지 않았는 데 친정엄마의 등장으로 나는 다시 약자가 되었다. 상처가 많은 사람만이 약자가 아니다. 친정에 일이 생기면 한순간에 약자가 되어버린다. 그렇지 뭐, 원래 그런 거야, 불편하다.
이런 날, 정신없었던 한 달이 몸으로 온 날. 맥주가 생각났다. 치킨과 맥주를 시켰다. 맥주는 늘 남편꺼였고 치킨은 아이들꺼였다. 맥주를 마시지 않은 것도 조금 되었고 치킨도 내가 먹자고 시키진 않는다. 그렇지만 오늘은, 오늘만큼은 나를 위해 주문을 했다. 잠시 후 치킨과 생맥주가 배달이 되었다. 맥주를 들이켰다. 시원하게 넘어가는 맥주에 기분이 좋았다. 달콤한 치킨도 맛이 괜찮다. 벌컥벌컥 마시는 모습을 보며 남편이 물었다.
맥주 마시려고 치킨 먹는 거야? 치킨 먹으려고 맥주 마시는 거야?
당연히 맥주 마시려고 치킨 먹는 거지.
난 치킨 먹을 때 굳이 맥주가 있어야 하지 않다. 오늘 나에겐 맥주가 필요했다. 내가 치킨을 너무 잘 먹어서 남편이 궁금했나 보다. 그런데 첫째 아이가 물었다.
엄마 무슨 일 있어? 안 좋은 일 있었어? 혹시 그만두래?
오랜만에 맥주를 마시는 내 모습에 아들은 내 상태를 먼저 살핀다. 남편은 보이는 것에 판단하고 아들은 보이지 않는 것에도 집중한다.둘의 성격은 정말 다르다. 가장 이성적인 남편과 가장 감성적인 아들. 그나마 재택근무를 하면서 둘의 대화가 많아졌다. 처음엔 삐걱삐걱 아슬아슬한 적도 있었지만 이젠 서로의 대화를 이어가는 요령을 알게 된 것 같다. 뉴스를 보다가 하나의 현상에 둘의 의견은 다를 때가 많다. 시간이 약이 맞다. 서서히 남편과 첫째 아들은 공통점을 찾아가고 있다. 어쩔 때는 가운데서 통역하는 느낌도 들 때가 있다. 성격 다른 남편과 아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느낀 것은 모난 말들도 대화를 자주 하다 보면 모서리가 둥글둥글해진다는 거다. 몇 달 전만 해도 딱딱했던 말들이 지금은 유연하게 받아진다.
그런데 첫째 아들이 그만두게 됐냐는 말은 뭘까. 내가 어딜 그만두냐고 물으니 글 쓰는데 아니냐고 했다. 맞다. 아들은 내가 어딘가에 소속이 되어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왜 저런 생각을 하는지 이해가 된다. 왜냐하면 우리 가족들은 내가 글을 쓰는 곳을 잘 모른다. 다만 엄마의 공간이 생겼다는 것을 말해줬기에 그렇게 받아들인 것 같다. 남편은 내가 글을 쓰는 지도 잘 모른다. 글을 쓴 지 한 달이 되었지만 남편 앞에서는 쓴 적이 없기 때문이다.
쓴 글 중에 조회수가 아주 많은 날이 있었다. 알림 진동이 계속 울려서 아이들이 엄마가 무언가를 쓰고 있다는 정도만 알게 되었었다.물론 남편은 아직도 모른다. 조회수로 마음이 떨렸던 다음날 새벽에 친정엄마가 집으로 오셨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났다. 병원을 오가며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매일이 며칠 인지도 모르게 흘렀다.
엄마의 병원을 오갈 때 긴 지하철을 타는 시간이 오롯이 내가 글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세 시간이 되는 지하철 안의 시간이지만 나에겐 소중하다.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어떤 변화를 가졌을까. 내가 놓친 것은 없을까. 문구 중에 '변화는 있어도 변함은 없기를'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변함이 없다는 말은 본연의 모습을 지니라는 말 같다. 그리고 주변 입장에서 바라볼 때 좋아하는 사람이 그랬으면 하는 바람 같다. 사람이 바뀌는 것은 쉽지 않다, 나 역시 변화를 가지려 할 뿐이지 내가 바뀔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내가 나를 바라보던 시선이 따뜻해지고, 나 스스로가 나를 사랑해주려고 노력 중이다.
그러다 보면 나의 표정은 더 밝아질 것이고 엄마 표정을 살피는 아들들의 수고스러움도 덜어줄 수 있겠지. 남편이야 나의 표정에 무딘 사람이지만 나의 마음이 여유로와질수록 훨씬 좋지 않을까. 뭔지 몰라도 남편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다. 핸드폰 거치대를 샀다며 내미는 남편을 보면서 알면서 모른척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도 싶지만. 서로 묻지 않는다. 남편이 모르고 있다는 것이 편하다. 남편은 연애 때도 내가 뭔가 하는 걸 응원해주던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 선물 받았던 것도 신문광고 관련 책이었다. 내가 디자인 공부를 할 때였다. 알면 응원해 주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