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순 노모를 뵈러 간다. 평일은 노치원을 다니시니 주말에만 가면 된다. 효심을 단전에서 끌어올려 보려 해도 쉽지는 않다. 사람은 많고 치매도 다양하겠지만 엄마의 치매는 분명 엄마 맞는데 또 엄마가 아닌 그런 치매이다. 환자로 대하기에는 멀쩡하고 정상으로 대하기엔 병중인 것도 맞다.
엄마와 2박 3일이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번엔 달랐다.
- 일요일 돌아오는 길, 그래 막힐 테면 막혀봐라. 월요일 출근 안 한다!
든든한 월요일이 있어 출발 전부터 힘이 났다. 엄마에게 더 다정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은 퇴직 후 가장 하고 싶은 일이 엄마와 몇 달 살기였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퇴직이 다가오는 그 몇 년 동안 엄마도 변했고 나도 변했다. 엄마와 몇 달 살기는커녕 어쩌다 오는 주말 함께 보내기도 숙제하듯 지나가고 있는 중이다.
- 무슨 물을 그리 쓰노?
설거지하지 말고 내 옆에서 내 이야기 들어라는 말씀이다. 외로움을 수다로 털어보자는 말씀인데 나도 이미 수백 번은 들었던지라 고개 끄덕일 마음도 없었다.
- 엄마, 우리 화투 칠까?
화투판을 꺼내고 연두색 이불을 깔아드렸다.
- 되것나?
하시더니 8승 2패! 엄마의 승리였다. 기분이 좋아 보이신다.
- 엄마, 이렇게 쭉 늘어놓고 하던 거는 뭐였어요?
여세를 몰아 다음 놀이로 슬쩍 유도해 본다. 할아버지한테 쫓겨나 이틀 만에 큰 언니 낳은 이야기 무한반복만 아니면 뭐든지 할 수 있다.
- 일 년 열두 달 운세 보는 거지
손에 남는 화투패 없이 똑 떨어지면 그 달 운세가 좋은 거란다. 정월부터 시작하니 그믐달까지 가려면 한참은 할 수 있다.
- 엄마, 내 운세도 봐주세요.
자식이 여섯이니 이 화투패로 오전은 넘길 수 있는 놀이다. 내 삼월, 사월 운세가 좋단다. 용하다! 신이 난 내가 맞장구를 몇 번 치니 엄마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신다.
- 삼월 사꾸라 산란한 마음 사월 흑싸리에 다 떨어지고 오월 난초 나는 나비 유월 목단에 춤을 추고 칠월 홍돼지 홀로 누워 팔월 공산에 달 떠 온다
구월 국화 맺었던 마음이 시월 단풍에 떨어지길 몇 번을 했을까? 엄마의 달력은 지금 어느 계절, 어느 달을 지나고 있을까?
- 네 젊음이 너의 노력에 대한 보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나의 잘못에 대한 벌이 아니다
누군가의 격언처럼 엄마의 잘못이 아님을 알기에 잠시 해방을 맛본 내가 먼저 말을 건네본다.
- 엄마, 큰언니 낳느라고 힘들었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