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0월 이상 한 증상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뾰족한 가위나 칼, 샤프를 보면 누군가를 찌르고 싶다는 상상을 했다. 그것도 가장 가까이 있는 아들의 눈을 바라보며 말이다. 미친 생각이다. 그리고 그러한 나의 생각에 죄책감을 갖고 괴로워했다. 어쩌면 나는 정말 인간쓰레기가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도저히 괴로워서 안되겠다 싶어 아내에게 모두 다 이야기했다. 아내는 자신이 진료 보는 정신과를 소개해 주었다. 정신과 초진은 3개월을 대기해야 할 정도로 대기 열이 상당히 길다. 아무래도 초진에서 다양한 증상을 파악하기 위한 진료가 진행돼서 그런가 보다. 항상 주기적으로 예약하고 방문하는 내담자들이 있으니 진료 시간을 예약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런데 우연하게도 한 명의 내담자가 진료를 취소하여 운 좋게 그 주 주말에 내원했다.
일단 정신과 진료를 받으러 가면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서 좌불안석이다. 그래서 아내에게 물어봤다. '진료실 들어가면 뭐라고 물어봐?" 아내는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상황을 그대로 말하면 된다고 안심시켜주었다. 그렇게 예약한 날 정신과를 방문했다.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긴장해서인지 손이 땀으로 흥건히 젖었다. 나의 이름이 호명되어 진료실 앞에서 노트를 하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오셨어요?"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현재 나의 상태를 횡설수설하며 의사에게 이야기했다. 가끔 해리를 경험하기도 하고, 뾰족한 물건을 보면 누군가를 찌르고, 그 사람이 어떤 아픔을 느낄지 상상한다는 솔직한 묘사를 했다. 의사는 충분히 나의 이야기를 들어보시고, "강박증이네요"라고 대답해 주셨다. 그동안 우울증으로 마음고생이 심해 심리학 도서를 읽고 치유의 글쓰기를 통해 상당히 호전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날벼락이었다.
강박증의 한 종류라고 말씀하시면서 '묻지 마 살인'이 10명 중에 한 명이 강박증으로 발생한다고 말씀하셨다. 그중 한 명이 나였다면 정말 큰일이었겠다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했다. 그래도 지금까지 이겨내온 이야기를 들어보시면서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말씀하셨다. 경직된 얼굴로 항우울제를 2주치 처방받고 약국에서 약을 받아 집에 오는 길에 너무 슬펐다. 지금까지 충분히 이겨냈다고 생각한 정신질환이 또 다른 형태로 나타나 심적 고통이 상당했다.
처음 복용한 항우울제는 부작용이 심했다. 속이 울렁거려서 점심을 먹어도 헛구역질을 했고, 2주간 먹어도 별 효용이 없었다. 2주 뒤에 다시 방문하여 그동안 있었던 약의 효과를 이야기했더니 다른 약으로 변경해 주셨다. 다시 2주를 복용했지만, 하루 종일 불안했다. 그냥 아무 이유 없이 하루 종일 불안하여 회사 업무 중에 다리를 계속 흔들었다. 그리고 다시 2주가 흘러 진료실에 방문하여 더욱 불안한 내면을 이야기했다. 의사는 얼굴이 굳어지며 약이 정말 맞지 않는다면 바로 교체해 주었다. 그렇게 여러 번의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부작용이 없는 항우울제를 찾았다.
이것도 양극성 우울장애가 아니라 단극성 우울장애라 나에게 맞는 항우울제를 찾을 수 있었다. 항우울제를 잠들기 2시간 전에 복용해도 바로 수면 상태로 바뀌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수면 유도제가 변경되었다. 변경된 수면 유도제를 복용하면 의식의 검열이 약해진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을 글로 모두 쏟아낼 수 있다. 비몽사몽간에 쓰는 글이지만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쓴다. 오히려 더 잘 써지는 느낌이 들 정도다.
지금도 10시에 복용한 항우울제와 수면유도제로 눈꺼풀에 100kg의 아령이 달려 있는 듯싶다. 하지만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해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쓰고 있다.
오늘은 재택근무하는 도중 오랜만에 회사에 출근했다. 다름이 아니라 3월에 이미 계약을 끝냈어야 했을 연봉협상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보통 연봉 협상이라고 하지만 통보와 다를 바 없다. 물론 이의 신청을 할 수 있지만, 적당히 만족할 만한 금액을 제시받았기에 쉽게 사인하고 근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회사에서는 나의 능력을 상당히 높게 평가한다. 나에게는 참 좋은 피드백이다. 하지만 나는 타성으로 회사를 다닌다. 내적 동기와 회사의 비전이 상당히 불일치한다. 게다가 팀 프로젝트의 비전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겠다. 그런데 능력이 출중하면서 자신의 할당된 업무만 하는 것에 약간의 불만을 표현했다. 더 할 수 있는 출중한 능력을 왜 발휘하지 않는지 그 이상의 능력을 끄집어 내고 싶다고 했다.
맞다. 나는 인정할 건 한다. 나에게 할당된 업무가 아니면 다른 일은 하지 않는다. 지금 회사에서 3번째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앞서 두 번의 프로젝트에서 의욕이 상당히 넘쳤다. 하지만 그 의욕은 오히려 독이 되었고, 혼자 정신 나간 미친 사람처럼 혁신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오히려 타부서 사람들이 벽을 만들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7년의 그런 경험이 나에게 타성을 만들게 했다. 열심히 해봐야 이뤄지는 건 없으니 맡겨진 일에서 충실하자라는 모토로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나에게 더 많은 성과를 내주었으면 좋겠다는 피드백을 받아들이기가 참 힘들다.
결국 리더가 그런 모습을 솔선수범해야 조직원이 조금씩 변한다. 그런데 그런 기미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리고 명백한 자신의 업무에 선을 긋는 다양한 팀원들을 보며 과연 내가 그래야 할까라는 의문도 들었다. 조직 문화는 사원 한 사람의 노력으로 변하지 않는다. 절대적으로 리더의 솔선수범이 그들의 다양성을 이끌 수 있다.
그래도 나에게 맡겨진 일에서는 최대한 대화하고 소통하려고 노력한다. 부족한 점이 발생하면 의견을 개진하고 최대한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토론한다. 더욱 다양한 조직원이 함께 만드는 개발의 문화를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그날, 프로젝트는 성공하리라 생각한다.
역시 항우울제를 먹고 비몽사몽간에 쓰는 의식적 흐름의 글쓰기는 검열을 최소화해준다. 앞으로도 항우울제를 복용하고 글을 쓰는 루틴을 한번 만들어봐야겠다. 나도 모르게 무의식의 다양한 통찰이 나올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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