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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준원 Aug 02. 2021

대학 간판이 그렇게 중요한가

컴퓨터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5.25 플로피 디스크로 부팅을 하면 커서가 깜박이는 도스 OS 시절에 어머니는 미래를 내다보셨는지 컴퓨터 학원을 보내주셨다. 학원에서 프로그래밍을 배우기는 했지만 초등학생인 나는 컴퓨터의 로직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도통 알지 못했다. 그저 제일 뒷자리에 앉아 테트리스를 플레이하며 최고 레벨에서 좌절하고 승부욕에 불타 있었다.


그렇게 내 인생에 게임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매일 학원에서 프로그래밍을 배우는 일은 뒷전이고 게임만 하는 모습을 어머니가 아셨는지 절대 컴퓨터를 사주시지 않았다. 물론 비싸기도 했지만 불 보듯 뻔한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친구 집에는 그린 모니터와 286컴퓨터가 있어서 자주 찾아갔다. 친구를 통해 삼국지 2라는 신세계를 마주했다. 게임에 매료되어 핵심 장수의 능력치를 노트에 정리하고 친구들에게 공유했다. 게임에 대한 지극 정성으로 중학 시절 드디어 어머니는 아들의 소원을 들어주셨다.



때마침 386 컴퓨터가 대대적인 광고가 나오기도 했고, 칼라 모니터의 개발로 퍼스널 컴퓨터는 일상으로 침투했다. 흑백 모니터에서 칼라 모니터로 바뀌고부터 컴퓨터 게임은 그야말로 일상이 되었다. 비디오 게임보다는 컴퓨터를 이용한 게임을 훨씬 좋아해서인지 고교 시절 문과와 이과를 정하는 과정에서 한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적성은 법학 50, 이공계 50이었지만 법학을 전공하면 판사, 변호사, 검사라는 한정된 직업에 고시원에서 사법고시를 패스할 때까지 공부만 해야 한다는 생각에 즐겁게 컴퓨터를 조작하며 게임할 수 있는 이공계를 택했다. 그래서 대학도 컴퓨터 공학과로 진학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아니 컴퓨터 공학이 아니면 다른 과로 진학하기 싫었다. 당시 컴퓨터 공학, 전자 계산 학과는 인기 있어서 원하는 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뭐.. 공부 자체도 그리 썩 잘하지 않아서 컴퓨터를 다루는 학과에 합격한 결과로 만족했다.



지긋지긋한 대학 간판

출처 : 서울대학교 보건 사업소


수도권에 위치한 학교에 입학하고 학교를 다니던 어느 날 아버지는 평생 기억에 남을 상처를 안겨주셨다. 지인들의 모임에 다녀온 아버지는 대뜸 가슴에 비수가 꽂히는 말을 하셨다.


"야. 아빠 친구들에게 너 한양대갔다고 이야기했어"

(난... 수도권 지방대학에 입학했는데..)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아버지의 의도는 분명했다. 아들이 수도권 대학에 입학하여 다른 사람에게 자랑할 거리가 없다는 하소연이었다. 그런데 굳이 나에게 상처될 말을 왜 했을까. 가슴이 아프고 마음 한편에 무거운 짐을 진 듯 답답했다.


어린 시절부터 모든 잘못의 원인은 나에게 있었다고 생각했다. 항상 잘해야 하는데 잘하지 못한 내 잘못이라고 생각하며 성장기를 보냈다. 대학생이 된 이후에도 여전히 잘못은 나에게 있었다. 서울 상위권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못난 아들이었다.


그래서 재수를 하기보다는 학교에서 수업만 듣고 집으로 돌아와 수능을 준비했다. 가끔 고등학교 담임에게 찾아가 모의고사 시험지를 얻어서 풀어보곤 했다. 그렇게 학교 간판을 바꾸려는 혼자만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남들은 대학 1학년 시절에 동아리 활동과 다양한 대외 활동으로 서로 친해져가는 마당에 홀로 수업만 듣고 집으로 오는 길이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그저 못난 아들의 대학 간판을 바꿔 아버지의 소원을 풀어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수능을 다시 치르고 집에서 가채점을 하는 순간에는 흥분상태였다. 이전에 본 수능 점수보다 훨씬 향상된 성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9시 뉴스에서는 평균 50점 이상이 오를 것이라는 김빠지는 전망을 방송했다. 수도권에 재학 중인 학교를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점수를 획득했지만, 소위 SKY는 어림도 없었다. 그래도 혹시나 모를까 학교의 간판을 바꾸고자 이곳저곳 관심도 없는 비인기 학과에 지원했다.


눈이 쌓인 대학 교정의 운동장을 터벅터벅 걸으며 면접 장소로 향했다.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찾아서 지원하고 학교에서 면접을 보았다. 그 쓸쓸함을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다. 학과에 지원한 이유를 묻는 교수의 질문에 전혀 준비되지 않은 엉성한 말을 내뱉었다. 당연하게도 관심이 없는 비인기 학과를 점수에 맞춰 지원했다고 말할 수 없어서 이리저리 핑곗거리로 일관한 면접이었다. 예상했다시피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그렇게 대학 간판 바꾸기 프로젝트는 막을 내렸다.


사실 대학교를 입학하고 자유를 만끽하고 싶었다. 그래서 수능을 다시 치른 다음 해에는 군입대를 미루고 진탕 놀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보통 1학년 마치고 군입대하지만 1년 학교를 더 다니고 싶었다. 학교 MT에도 자주 참여하고, 그동안 자주 못했던 스타크래프트 게임도 신나게 했다. 하나의 좌절은 다시 자존감을 낮추는 결과가 되었다. 괴로운 마음을 달래는 그저 정신없이 사는 방법뿐이었다. 게임과 당구, 술로 회피하는 삶을 살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부끄러움보다 슬픔이 가득하다. 나름대로 인정받으려고 노력했지만 결과는 아버지의 욕심에 턱없이 부족했다. 그렇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대학 간판을 바꾸었다고 하더라도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땅을 치며 후회할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지방대였어도, 내가 좋아하는 컴퓨터를 공부할 수 있는 학과를 졸업해서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가득하다.







#월급쟁이아빠의생존분투기 #대학간판이그렇게중요한가 #SKY아니면인정없음 #지방대출신개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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