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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준원 Aug 21. 2021

학벌세탁에 성공했지만 우울했다

대학의 간판을 바꾸는 프로젝트에 실패하고 2학년에 비로소 여러 모임에 참여했다. 1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가는 동기들이 상당수였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그동안 노력한 과정에 스스로 보상을 주고 싶었다. 어떻게 보면 보상이라기보다 무기력에 가까웠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는 사람인가라는 생각이 더 강했다.


그렇게 광란(?)의 2학년을 마무리하고 추운 겨울 논산 훈련소에 입소했다. 시간이 흘러 자대 배치를 받고 열심히 군 생활에 적응했다. 아무 생각 없이 주어진 훈련만 착착 받으며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 그렇게 이등병에서 일병, 상병, 병장이 되었다. 당시 육군 복무 기간은 26개월이었으니, 마지막 병장의 6개월은 어쩌면 길고도 무료한 시간이었다.


인간은 무언가에 적응하면 학습된 무기력에 빠지기도 한다. 발전 없이 계속 똑같은 작업이 주어지지만, 긴장과 기대감은 전혀 생기지 않으니 말이다. 게다가 사병 중에서 최고의 위치에 올라 내무실에서도 긴장감보다는 편안한 일상이었다.


그렇게 병장으로 한두 달을 보낸 어느 날이었다. 제대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인식했던 그 순간 갑자기 불안해졌다. 제대하면 나이가 24살이었고 학교에 복학하면 25살이었다. 갑자기 경제적으로 독립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지금까지 내가 가진 능력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에 불안감은 더욱 깊어졌다.



복학 전 아르바이트


26개월의 군 복무를 모두 마치고 사회로 돌아와 세상에 다시 적응했다. 미루던 자동차 운전면허도 취득하고, 군 복무 시절에 배운 트레이닝도 이어가고자 헬스장도 다녔다. 그런데 문득 복학하기 전에 무언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부모님은 어학연수를 다녀오면 어떠냐고 물어보셨지만, 2급 군사비밀 인가증을 지닌 특수부대 특성 탓에 해외로 나가는 절차가 복잡했다.


사실 새로운 도전을 극도로 두려워한 마음이어서 군사 기밀을 핑계로 어학연수를 가지 않았다. 그 대신 아르바이트 사이트를 뒤적거리다가 한 가지 마음에 쏙 드는 일을 찾았다. 노래방, 서빙, 커피숍, 패스트푸드점 아르바이트는 너무 식상해 보였다. 아마도 노래방 아르바이트 경험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그래서 조금 특별한 아르바이트를 선택했다. 그것은 백화점 청소 아르바이트였다.


백화점에서 청소 아르바이트를 고용하는 곳은 현대백화점 뿐이었다. 오전 7시 30분에 대기실에 도착해 오후 6시 30분까지 백화점의 각 층을 한 명이 담당하는 시스템이었다. 보통 백화점은 1층과 2층, 그리고 사람이 가장 많이 몰리는 유아용품 층이 먼지가 자주 쌓인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씩 로테이션을 돌며 층을 변경한다.


사실 백화점에 먼지가 별로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기름걸레로 30분에 한 번씩 여러 번에 걸쳐 먼지를 걸러내야 했다. 바닥에 붙은 껌도, 아이가 흘린 아이스크림도 호출이 오면 청소해야 했다. 약 4달에 걸쳐 청소 아르바이트를 하며 역지사지를 제대로 배웠다. 그때의 경험은 지금도 회사 건물을 매일 청소하며 마주하는 미화원을 보면 반갑게 인사하고 최대한 내가 머물고 간 자리는 쓰레기가 없도록 치운다.


주도적으로 공부를 해본 경험이 없어서인지 정답이 정해져 있는 문제보다는 사회에서 여러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 지금도 특이한 백화점 청소 아르바이트는 내가 해본 20대의 가장 값진 사회 경험이었다.



장학금을 받으려는 복학생


청소 아르바이트를 기점으로 사회인으로 경제적 활동을 하려면 특정한 기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복학하는 3학년과 그 이후 4학년의 생활이 앞으로 삶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생각은 큰 압박이었다. 그리고 불안의 원천이었다. 20대 중반을 향해 가는 나이까지 '더 잘해야 해'라는 부정적인 피드백을 수도 없이 들었던 터라 무언가를 도전하는 젊은 패기는 온데간데없었다. 실수가 두려웠고, 실패자의 삶을 살기는 더욱더 싫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우선 학생 신분으로 가장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는 가장 확실한 목표는 학점 관리였고 장학금은 결과물이라 생각했다. 3학년 복학과 동시에 장학금을 받으려고 학과 공부에 매진했다. 열심히 출석하고 과제 발표하고, 시험을 치렀다. 그렇지만 스스로 공부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던 터라 장학금은 결과물로 나타나지 않았다.


여느 때 같았으면 다시 실패자라고 생각하며, 장학금 자체를 포기했을 텐데 3학년 여름 방학에는 평소와 달랐다. 장학금을 다음 학기에는 꼭 받고 말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3학년 2학기를 보내고 반액 장학금을 받았다. 학부 140명 중에 1등은 전액 장학금 그리고 7명에게 반액 장학금이 지급된다는 사실은 뒤늦게 알았다. 하지만 여전히 아버지는 칭찬하지 않으셨고, 1등 하지 못한 아들이 못내 아쉬운 듯했다.



취업 vs 대학원


비록 아버지의 칭찬은 없었지만, 장학금을 받으며 한 가지 위안으로 삼을만한 결과는 흥미로운 과목이 생겼다는 점이다. 코딩에 이렇다 할 흥미를 느끼지 못한 상태에서 데이터베이스라는 전공과목에 관심이 집중됐다. 아마도 공부라는 행위에 처음으로 관심이 생긴 시기가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데이터베이스라는 과목에 집중하고 관련 자격증까지 취득하기에 이르렀다. (대략 8개월 걸림..) 다른 학생들은 정보처리기사로 졸업 시험을 대체하였지만 그 당시에도 다른 사람과 똑같은 방향성에서 벗어나고픈 반항아 기질로 혼자 오라클 DBA 자격증을 취득했다. 자격증을 공부하며 관련 분야로 취업을 알아보았지만 그렇제 만만하지 않았다. 그래서 공부를 더 해보고자 대학원을 선택했다.


대학원을 진학하려면 학점 관리가 필수였다. 1~2학년 과정에서 성적이 나쁜 과목은 재수강으로 학점을 갱신해야 했다. 남들은 4학년 2학기에 취업 준비하느라 최소 학점으로도 학교생활이 충분했지만, 대학원에 입학하려고 마지막 학기까지 20학점을 신청하고 바쁘게 학점 관리에 전념했다. 학점 관리와 두근거리는 면접을 통과하여 소위 상위권 대학원에 입학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대학원이라는 곳에서 데이터베이스를 더 공부하고 싶은 열망도 있었지만, 내심 아버지가 원하는 상위권 대학의 이름으로 바꾸려는 마음도 공존했다. 마치 오랜 숙원을 해결한 듯한 느낌이었다. 이런 느낌은 대학원 졸업식에서 무참히 깨지기 전까지 이어졌다. 서울대가 아니면 만족하지 못하는 아버지는 수많은 인파 속에서 치러진 석사 수여식에 참석하지 않으셨다.


석사 전공과 무관한 게임 개발을 다짐하고 공부를 더하려는 아들이 못 미더워서였을까. 이후 인정 욕구는 사회에서 일중독과 더불어 완벽주의를 부추기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학벌세탁에 성공했다. 게임 업계에서 거의 필요 없는 학위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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