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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준원 Jan 14. 2022

인간 개개인은 도덕적인데 왜 사회는 비도덕적일까.

인간이 존재하는 세상은 다양한 사람이 살아간다. 매우 적은 수의 유전자의 차이와 경험으로 전혀 다른 사람으로 성장한다. 이렇게 서로 다른 인간은 혼자서는 살아가지 못하여 집단생활을 추구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은 집단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는 방증이다.


집단에는 여러 종유가 있다. 인종, 성별, 국가, 단체, 조직, 모임, 가족 등등 너무나도 많은 부류가 존재한다. 그리고 각 개인의 생각이 모여 새로운 공동체가 탄생하기도 한다. 공동체가 생겨나다 보면 다른 신념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또다시 생겨나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싶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에 동조하는 사람이 생기면 어느덧 비슷한 신념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룬다. 반대 개념을 가진 공동체라기 보다 다른 관점을 가진 공동체라고 볼 수 있다. 인생을 살며 나와 가치관이 전혀 다른 사람을 많이 만나지만, 서로 배척하고 비판하는 공동체에 속한 경험은 없다. 하지만 최근 다양한 사회활동을 토대로 개개인이 뭉쳐 사회를 이루는 현상이 얼마나 힘들고 어렵고, 큰 힘을 발휘하는지 깊게 체험하고 있다.



인간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이해관계도 고려하며, 또한 때에 따라서는 행위의 문제를 결정함에 있어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더욱 존중할 수도 있기에 도덕적이다. 그러나 이 모든 성과들은 인간 사회와 사회집단에서는 개인들에 비해 훨씬 획득되기 어렵다.


모든 인간의 집단은 개인과 비교할 때 충동을 올바르게 인도하고 때에 따라 억제할 수 있는 이성과 자기극복 능력,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욕구를 수용하는 능력이 훨씬 결여되어 있다. 개인의 이기주의적인 요소들을 정화할 수 있지만 개인마다 정도의 차이가 발생한다. 이러한 개개인 간의 간극으로 말미암아 집단을 이루었을 경우 개개인의 성과를 집단에서 정량적으로 파악하기가 어렵다.


사회적 상황에서 완전히 합리적인 객관성이란 절대로 불가능하다. 인간의 이성은 항상 어느 정도는 사회적 상황 내에서 이해관계의 노예이기 때문이다. 양면성이 존재하는 이해관계에서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 명확하게 분간하기 어렵다. 그래서 사회 불의는 교육가와 사회과학자들이 일반적으로 믿고 있는 바와 같이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권고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



인간이 모인 공동체에서 갈등은 불가피하다. 사회에서 사람들의 이해관계는 매우 복잡한 거미줄과 같다. 그러한 상황에서 합리적인, 객관성을 가진 보편적인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개인의 성과와 다른 누군가의 성과를 온전히 비교할 보편적인 법칙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갈등은 보편적인 원칙이 아닌 합의를 통해 적절히 해결할 수밖에 없다.


개인의 신념, 가치관, 그들이 맺고 있는 관계, 상황에 대한 맥락을 고려하여 갈등을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논쟁과 토론은 수많은 가치관을 만들어내고 여러 사람의 지지를 얻는 방향으로 규칙은 만들어진다. 그렇다고 이러한 규칙이 완벽하다고 말할 수 없다. 분명히 누군가는 어쩔 수 없이 규칙을 따라야 할 경우도 존재하니까.


집단적 행동에 있어서 비합리적인 이기주의의 끈질김에 비추어 볼 때 사회적 갈등이 인간의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불가피한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소수자에 대한 차별, 성 불평등과 같은 문제는 집단적 이기주의라 볼 수 있다. 이러한 다수와 소수의 차이는 권력으로 좀처럼 해결하기 힘든 사회 문제다. 과연 이런 충돌들이 협상이라는 행동으로 해결이 가능할까 의문이다.


권력의 힘을 소수 시민들과 집단이 만족할 만한 결과로 이끌어 낼 수 있을까. 결국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그에 반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분명 존재한다. 그들은 갈등의 해결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한 집단에 속하는 개인들 간의 관계를 순전히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조정과 설득에 의해 확립하는 일은 비록 쉽지 않을지라도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집단과 집단 사이에서는 조정과 설득이라는 일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고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의 저자는 주장한다.



인간과 사회


인간 사회는 인간 생활의 보존과 실현을 보장해 주는 자연적 혹은 문화적 산물들을 공정하게 분배해야 하는 문제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 빈익빈 부익부를 제도로 어느 정도 완화할 수 있지만 절대로 공정하게 분배할 수 없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을뿐더러 각 개인마다 지니고 있는 능력과 만족은 다르기에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펼치며 사회에서 활동한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평등하게 분배할 수 없다.


인간의 정신과 상상력은 많은 한계와 제약을 받고 있다. 그리고 인간은 개인적인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다른 인간들의 이익을 충분히 자신의 것처럼 생각하는 인식이 불가능하다. 이로 인해 우리는 사회 통합을 유지하려면 불가피하게 강제력을 사용한다. 그러나 평화를 보장해 주는 바로 그 힘은 동시에 불의를 위해 사용되기도 한다. 누군가의 평화를 보장해 주는 이익을 내세우면 이와 반대되는 다른 집단의 자유는 당연하게도 침해당하기 때문이다.




전체의 이익을 꾀하려고 도덕적 선의지를 희생시킬 만큼 무책임한 권력을 가진 권력자들 사이에서 도덕적 선의지를 논의한다는 그 자체가 불가능하다. 권력의 힘은 강제적 방법으로 파괴되어야 하지만, 이 방법들은 항상 권력을 파괴한 불의의 자리에 새로운 형태의 불의를 가져올 위험이 있다.


쉽게 설명하면 자연 생태계를 예로 들 수 있다. 생태계는 먹이사슬로 순환 구조를 이룬다. 약육강식은 약자는 강자에게 잡아먹힌다는 이야기로 먹이사슬을 대변해준다. 그러나 인간 사회는 항상 약자와 강자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 강자의 힘이 조금 약해지는 틈을 타 약자가 힘을 비축하면 어느덧 약자와 강자의 위치는 바뀌게 된다. 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그 자리에 약자가 자리를 잡으면 위치만 바뀔 뿐 또 다른 누군가는 그들의 권력에 의해 약자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의 역사에서 수차례 반복되어 왔다.


앞으로 다가올 세상은 강제력이 없이 완전한 평화와 정의로 충만된 이상적 사회의 건설에 있지 않다. 충분한 정의는 있지만, 그의 공동 작업이 전적으로 재앙에 빠지지 않도록 비폭력적인 사회의 건설에 있다. 그러려면 비슷한 권력의 힘을 지닌 여러 공동체가 존재해야 하지 않을까.


국가와 국가 간의 이익을 도모하려는 끊임없는 현상 자체가 사실은 평등보다는 힘의 세기에 의해 입장 차이가 발생한다. 다수의 집단을 위해 실행하는 정책, 제도는 그 누군가의 희생과 억울함을 야기한다. 그런 그들에게 충분한 정의가 무엇일지 고민해 봐야 한다.


희생과 억울함에 상응하는 보상이란 있을 수 없지만, 서로 간의 이해 차이를 좁히는 방법은 분명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강제력을 비폭력적으로 발현하는 사회가 아닐까 한다.



참고 도서 :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저자 : 라인호드 니버



#도덕적인간 #비도덕적사회 #사회비평 #자유 #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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