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가 조직이 아니라 ‘집단’처럼 느껴지던 날
그 시기를 돌이켜보면 회사라는 곳이 처음으로 '같이 있는 사람들의 모임'처럼 느껴졌던 순간이 있습니다. 바로 연말 사내 게임 대전이었지요. 그전까지 나에게 회사는 '나를 써주는 곳', '내가 살아남아야 하는 곳', '갑자기 잘릴 수도 있는 곳'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안정된 울타리라기보다는 불안정한 시장에 가까웠습니다. 그런데 이 회사에서는, 적어도 연말 하루만큼은 그 느낌이 바뀌었습니다. 우리는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개인들이 아니라, 같은 무언가를 하는 사람들처럼 느껴졌습니다.
'우리 회사'라는 말이 빈 문장이 아니었던 날. 그게 바로 사내 게임 대전이었습니다. 이건 그냥 친목 행사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말 그대로 회사의 성격을 드러내는 의식이었습니다. 그날만큼은 모두가 ‘같은 세계’를 살고 있었거든요.
그 회사에는 크게 나누면 세 축이 있었습니다. 이미 라이브로 서비스되고 있는 게임을 운영하는 팀. 새 게임을 만들고 있는 신규 개발팀. 그리고 기술적으로 기반을 깔아주는 게임 엔진 개발 인력. 이 세 그룹을 다 합치면 거의 80명 가까운 규모였습니다.
중요한 건 이 인원이 전부 기획자나 마케터까지 합친 숫자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순수하게 개발 쪽 인력만 80명에 가까웠습니다. 게임 회사 입장에서 이건 꽤 큰 몸집입니다. 각자의 역할도 달랐지요.
어느 팀은 라이브 유저 지표를 붙잡고 살았고, 어느 팀은 새로운 재미를 뽑아내는 데 온 신경을 쓰고 있었고, 또 어느 팀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시스템과 엔진을 만드는, 일종의 인프라를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팀마다 언어가 다릅니다. 라이브팀은 '오늘 지표'를 말하고, 신규팀은 '다음 빌드'를 말하고, 엔진팀은 '프레임 드롭'이나 '툴 파이프라인' 같은 말을 합니다. 현실적으로 이 세 팀은 각자 전쟁을 치르고 있는 셈입니다.
매일 마주 보고 일해도 완전히 같은 싸움을 하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그 서로 다른 전쟁을 치르는 사람들이 한날한시에 같은 전장을 공유합니다. 그게 바로 연말 사내 게임 대전이었습니다.
장르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대전의 종목은 자연스럽게 정해졌습니다. 당시에는 모두가 알만한 국민 게임들이 있었거든요.
서든어택.
카트라이더.
둘 다 당시 PC방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고, '웬만하면 한 번쯤은 해봤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게임이었습니다. 이 선택이 정말 탁월했다고 저는 지금도 생각합니다.
사내 행사를 한다고 했을 때, 특정 장르에만 특화된 게임을 고르면 그 순간 분위기가 갈라집니다. 예를 들어 격투 게임만 넣으면 격투 고수 둘이서만 신나고 나머지는 구경꾼이 됩니다.
AOS(MOBA)만 넣으면 특정 라인전 용어부터 못 알아듣는 사람은 아예 대화에서 빠져나가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참여도가 떨어지고, 결국 ‘팬클럽 행사’처럼 변질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서든어택, 카트라이더는 달랐습니다.
누구나 바로 참여할 수 있고, 조작이 직관적이고, 무엇보다 '지면 억울한' 게임입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같이 웃어야 팀이 됩니다. 근데 그냥 웃는다고 해서 팀이 되는 건 아닙니다.
'지기 싫다'라는 감정이 나오고, 그 감정을 같이 경험하고, 그 장면에서 터지는 웃음이 팀을 만듭니다. 서든어택에서는 8명씩 팀을 짜서 붙었습니다. 실제로 총싸움인데, 이건 단순한 FPS 승부를 넘어서 자기 팀 명예 싸움이 되었습니다.
“기획팀이 프로그래머 팀 이겼대.”
“엔진팀 총 잘 쏜다더니 소문이 사실이었네?”
“야 너 카트 오래 했다며? 말만 하고 왜 벽에 박아?”
이건 상대를 공격하는 놀이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상대를 인정하는 문화였습니다. 전투를 하고 나면 이상하게 서로 말문이 열립니다. 게임이라는 건, 몸으로 부딪힌 기억이 대화를 대신 여는 도구가 됩니다.
경쟁은 싸움을 만들지 않았다. 소속감을 만들었다.
그 대전은 단순히 게임을 했다는 활동 하나로 요약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관계 구조를 다시 짠 이벤트였습니다. 서로 잘 모르는 사람들이 같은 팀이 되어 ‘우리가 이겼다’, ‘우리가 졌다’를 공유합니다. 이건 회사에서 보통 만나지 않는 감정을 제공합니다.
업무에서 '같은 편'이라는 건 주로 일정과 책임의 문제입니다. “이 일정 같이 맞춰야 하니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한 편이야.” 이건 의무적으로 묶이는 동맹입니다. 반면 게임에서 '같은 편'은 이렇게 작동합니다.
“너 때문에 우리가 살았다.”
“방금 그거 깔끔했어.”
“아 그 타이밍에 저기 막아준 거 진짜 큰 거였어.”
이건 칭찬과 신뢰의 언어입니다. 특히 감정이 실린 즉각적인 언어죠. “야! 나이스!”라는 한마디가 의외로 3개월 치 팀워크를 대신하기도 합니다.
저는 그날 처음으로, 협업이 꼭 문서나 보고서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는 걸 체감했습니다. 몸으로 같은 순간을 치르고 나면, 사람 사이의 선이 약간씩 부드러워집니다.
그 부드러움이 다음 협업을 편하게 만듭니다. 그게 조직 문화의 본질이라는 걸 저는 그때 처음 배웠습니다. 그 순간이, 제 인생의 첫 조직 문화였어요.
“회사에서 이런 걸 해도 돼요?”
이 행사는 저에게는 ‘첫’ 경험이었습니다. 그전까지 경험한 회사는 늘 위기였습니다. 기획 변동, 일정 압박, 베타 대응, 매출 압박, 조직 정리, 권고사직.
회사는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입을 다물고 몸을 갈아 넣어 버티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회사에서는 연말에 전 직원이 모여 게임을 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거죠.
“회사 시간에 게임을 한다.”
처음엔 이상했습니다. 이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 이게 진짜 조직에서 허용받는 문화인가? 그런데 실제로 그날은 공공연히 허용되었습니다. 심지어 다 같이 하는 거니까 숨길 필요도 없었습니다.
“우리, 우리끼리 논다.”
이 말이 공공연하게 허락되었다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건 저에게 일종의 안전 신호였습니다.
“아, 이 회사는 ‘사람’을 본다.”
“단순히 리소스(인력)로 쓰는 게 아니라, 이 사람들이 어디서 동기부여를 받는지를 관리하려 한다.”
“여긴 내가 중간에 갑자기 버려질지 모른다는 공포만으로 운영되는 조직은 아니구나.”
그 '안전하다'라는 신호는 제게 굉장히 컸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이미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나 ‘하루아침에 잘린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신뢰할 만한 땅을 밟는 느낌. 그게 그 행사에서 처음 찾아왔습니다.
OX 퀴즈, 그리고 기억에 박힌 장면 하나
사내 게임 대전은 팀전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에는 모두를 한 자리에 모아놓고 OX 퀴즈를 했습니다. 그 장면이 지금도 강렬하게 남아 있습니다.
회사 사무실 한가운데, 탁 트인 공간에 사람들이 서 있습니다. 진짜로 전 직원이 한 공간에 모여 'O', 'X'로 줄을 나눠 서는 겁니다. 문제가 나오고, 모두가 동시에 이동하고, 틀린 사람은 탈락하고. 이건 정말 단순한 레크리에이션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날만큼은 직급과 직책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팀장도 'O' 앞에 서고, 막 입사한 신입도 'O' 앞에 섭니다. 틀린 사람은 그냥 탈락이고, 남은 사람은 농담 삼아 “오~” 소리 듣습니다. 그 평평함. 그 위계가 수평화되는 기분. 그 분위기는 15년이 지난 지금도 제 머릿속에 아주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저는 그날 처음으로 느꼈습니다.
“아, 나는 지금 팀의 일부구나.”
“나는 그냥 ‘조직원이니까 오는 사람’이 아니라 ‘같은 편’이구나.”
이 감각은 제게 생각보다 컸습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그날은 제게 ‘소속감’이라는 단어가 처음 실물로 보인 날이었습니다.
왜 이걸 지금도 기억하나
그 행사는 단순히 재미있어서 기억에 남는 게 아닙니다. 그건 하나의 구조를 제 안에 심었습니다. 그 구조는 대략 이런 겁니다. 함께 땀을 흘리거나 몰입한 경험은 팀을 묶는다. 서로 불태운 순간이 있으면, 그다음부터 말이 쉬워진다. 유대감은 “우리 열심히 합시다!” 같은 구호로 생기지 않는다.
실제로 같이 놀아봐야 생긴다. 우리는 흔히 회사에서 사람을 묶는 방식을 보고서나 규칙에서 찾으려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날 이후로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묶는 건 경험입니다. 공동 경험. 같이 웃은 기억, 같이 긴장했던 기억. 워크숍도 그 역할을 합니다. 합숙도, 미니 해커톤도, 사내 대회도 다 같은 역할을 합니다. '우리 서로에게 관심 있다'라는 신호를 조직 차원에서 주는 행위. 그게 있으면 서로가 상대를 ‘리소스’로만 보지 않게 됩니다.
상대가 '같이 하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저는 이걸 몸으로 배웠고, 그래서 지금도 이와 비슷한 문화를 만들 기회가 있으면 웬만하면 해보자고 말합니다.
억지로 시켜서 억지로 웃게 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단순히, 우리가 진짜로 같이 놀아본 적이 있는가? 그 질문에 “예”라고 답할 수 있는 회사는 의외로 얼마 없습니다.
‘재미’라는 단어의 새로운 의미
이전 화들에서 저는 계속해서 '재미'라는 단어를 이야기했습니다. 플레이어로서 느끼는 재미, 게임 안의 타격감과 손맛으로 느끼는 재미, 내가 만든 화면 위에서 누군가 웃는 걸 보는 재미.
그런데 연말 사내 게임 대전은 제 안에서 그 단어를 한 번 더 확장시켰습니다. 아, 재미는 결과물이 아니구나. 재미는 관계를 만드는 도구구나.
우리가 같이 웃고 같이 열을 올린 그 순간 자체가 팀을 묶어줬습니다. 그리고 그 팀이 다음 프로젝트를 더 잘 만들 수 있는 바탕이 됐습니다. 그걸 몸으로 이해하니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재미를 만드는 업계에서 일한다면, 일하는 과정에서도 재미를 느끼는 구조를 갖고 있어야 한다.”
게임을 만드는 사람들이 정작 일할 땐 완전히 갈려나가고, 각자 방 안에서 서로 신뢰도 없이 버티고, 그리고 그런 상태로 유저에게만 “재밌죠?”라고 묻는다면 그건 이상하잖아요.
진짜 좋은 게임은, 그 게임을 만드는 사람들 사이에도 최소한의 신뢰와 웃음이 흐르는 상태에서 나온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 믿음은 바로 그 사내 대전에서 생겼습니다.
#사내문화 #연말이벤트 #게임대회 #유대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