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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아이의 호기심을 해결하는 방법

by 곽준원
‘가르쳐야 할 때가 왔다’는 신호

어느 날 아이가 “아빠, 게임은 어떻게 만들어?”라고 질문했습니다. 이건 사실 굉장히 중요한 순간입니다. 단순한 호기심 질문이 아니고, 아이가 부모의 세계로 들어오고 싶다는 신호입니다.


평소에 아빠가 뭘 그렇게 컴퓨터 앞에서 집중해서 하는지, 왜 어떤 날은 늦게 오고, 왜 어떤 날은 설레어하는지 궁금해진 겁니다.


프로이트도, 비고츠키도, 에릭슨도 다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아이는 어느 시점이 되면 부모의 일과 놀이가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지 모사하려는 욕구가 생깁니다. 그게 “게임은 어떻게 만들어?”라는 말로 튀어나온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입니다. 아이는 현상을 묻는데, 부모는 과정을 알고 있고, 개발자는 구조로 생각합니다. 레벨이 서로 다른 셋이 같은 말을 하기 시작하니까 곧바로 단어가 안 맞는 거죠.


아이: “어떻게 만들어?”

개발자 아빠: “음… 기획이 있고, 그 위에 엔진이 있고, 렌더링 루프가 있고…”

아이: (벌써 마인크래프트 생각 중)


이때 보통의 어른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 애가 아직 어리구나.'


그런데 저는 특이하게도 거꾸로 생각했습니다.

'내가 아직 설명을 못하는구나.'


중년은 왜 ‘의미의 수호자’가 되나

아이의 질문을 받았던 무렵에 읽었던 책이 한 권 있습니다. 바로 <행복의 조건>입니다. 그 책에서 40대 이후를 '의미의 수호자'라고 표현합니다. 이 단어는 에릭슨의 발달이론에서 말하는 '생산성 vs 침체' 단계와도 닮아 있습니다.


보통 중년이 되면 인간에게는 새로운 욕구가 하나 생깁니다. “내가 여기까지 살아오며 버텨낸 것들을 그냥 끝내지 말고 다음 세대에 넘겨주고 싶다.”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욕구가 이러한 글을 쓰는 동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건 단순히 착해서 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살아온 시간이 의미 있었음을 확인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 '그 시간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온라인에서 꾸준히 게임 개발에 관심이 있는 학생과 취준생에게 무료로 상담을 지속했습니다. 대학교에서 진행하는 직무 상담도 1순위로 생각하고 참여했습니다.


사실 이러한 중년의 멘토링 욕구는 '내가 남긴 흔적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존재록적 요구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그걸 제일 강하게 시험하는 존재가 누구냐면, 바로 아이입니다. 학생들은 존댓말을 하니까 어느 정도 지적인 높이를 유지해도 되는데, 아이는 그런 거 안 해줍니다.


'재밌냐, 아니냐.'

'알겠다, 모르겠다.'

이 두 개로만 평가하죠.


그래서 아이에게 설명이 통하면, '아, 이건 진짜 설명이구나' 하고 확신이 옵니다.


비고츠키의 ‘근접발달영역’과 아들에게 맞추기

교육심리학자 비고츠키가 말한 근접발달영역(ZPD)이란 게 있습니다. 아이가 혼자서는 아직 못하지만, 도움을 받으면 할 수 있는 영역을 말합니다. 설명을 잘하는 사람은 이 ZPD를 정확히 찾아서 거기서 출발해요.


처음에는 “게임은 이렇게 기획부터 해서..”로 설명했지만 아이는 곧바로 흥미를 잃습니다. 왜냐하면 그건 ZPD 밖의 설명이었거든요. 그래서 방식을 바꿉니다.


“바탕화면 아이콘 있지?”

“그거 더블클릭하면 뭐 돼?”

“게임 켜져!”

“그래. 그게 바로 사람하고 컴퓨터가 대화한 거야.”


여기서 배우는 포인트가 두 개 있습니다. 설명은 반드시 경험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아이가 매일 마우스를 잡는 그 화면에서 시작하니까 귀가 다시 열립니다. 그리고 이름은 나중에 붙여도 됩니다.


“그래서 그걸 우리가 인터페이스라고 불러.”


개념은 끝에 살짝 던집니다. 이 순서가 올바른 순서입니다.

체험 → 의미 → 이름.


우리가 교육에서 자주 거꾸로 합니다.

이름 → 의미 → 체험.


그래서 애들이 “그래서 이게 어디다 써요?”라고 묻는 거죠.


UI는 왜 아이가 좋아했을까

흥미로운 점은, 아이가 UI 설명에는 매우 만족했다는 부분입니다. 이게 왜 그럴까요? UI는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고, 결과가 즉각적이기 때문입니다.


누르면 켜진다.

닫으면 사라진다.

끌어다 놓으면 옮겨진다.

이 세 가지는 초등학생의 인지 구조와 딱 맞습니다..


피아제가 말한 구체적 조작기 단계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 현재 일어나는 것, 조작 가능한 것을 제일 잘 이해하거든요.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GUI)'는 그 자체로 구체적 조작의 교과서입니다.


“아이콘은 그림이지? 그걸 사람이 눌렀지? 그럼 컴퓨터가 알아들은 거야. 이게 ‘사람-컴퓨터 사이의 통로’야.

그래서 인터페이스라고 해.”


이건 철학적으로 말하면 매개에 대한 설명입니다. 도구를 통해 인간과 대상이 연결되는 구조. 마르틴 부버가 '나-너 관계'를 말했다면, 컴퓨터는 '나-도구-너'의 구조를 갖는 셈이죠. 그걸 아이 눈높이로 풀어서 설명했습니다.


설명하려면 내가 먼저 많이 알아야 한다

여기서 교육자의 역설이 하나 나옵니다. 아이에게 쉽게 설명하려면, 사실 어른이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비유를 들려면 원 개념을 이해해야 하고, 그걸 치환할 만한 일상 소재를 알고 있어야 하고, 아이가 이미 경험해 본 장면을 파악하고 있어야 하고, 그 장면에 맞는 단어 길이를 조절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점차 독서와 글쓰기에 매진하게 되었습니다. 설명은 결국 어휘력의 싸움이고, 어휘력은 경험을 얼마나 다양한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느냐의 문제거든요. 교육을 잘하려면 기술서적만으로는 안 됩니다.


인문학, 심리학, 철학을 조금이라도 같이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같은 걸 보더라도 '통로', '중간다리', '대화창', '창구', '언어', '수단', '번역기'처럼 여러 겹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하니까요. 사실 이건 소셜멘토링에서 학생들 답변을 쓸 때도 똑같이 작동했을 겁니다.


“게임회사 들어가려면 뭘 준비해요?”


“C++이랑 알고리즘이요”로 끝낼 수 있지만 지금 어디까지 왔는지 대략적인 파악이 되면 그때부터는 상대 수준에 맞춰 내려가야 하거든요. 아이에게 설명하는 훈련은 멘토링의 가장 극단적인 연습이었습니다. '초등학생이 알아듣는 설명 = 누구나 알아듣는 설명'이니까요.


왜 우리는 컴퓨터 용어를 던지고 싶어 질까

설명하다 보면 꼭 이런 순간이 와요.

“여기까지만 말하면 너무 단순해지는 거 아닌가?”

“이 정도는 알아야 진짜인 건데..”


그래서 우리는 어느 순간 이런 말을 꺼냅니다.

“이게 사실상 OS에서 메시지 루프를 돌면서..”


그 순간 아이는 사라집니다. 이 충동은 왜 생길까요? 이건 전문가의 자기 확인 욕구입니다. '나 이 정도는 안다'를 나 자신에게 증명하고 싶은 마음이 설명 속에 끼어드는 겁니다. 그런데 교육철학에서는 이걸 교사 중심 설명이라고 부르고, 좋은 교사는 여기서 한 발짝 물러납니다.


“이 설명은 내가 만족하려고 하는 설명인가, 아이가 이해하려고 하는 설명인가.”


저는 막연하게 이러한 개념을 이해하고 있어서 다시 GUI로 내려갔습니다. 이게 바로 관계지향 설명이 아닐까요. 상대가 떠나지 않게 설명하는 것. 이건 심리상담에서 말하는 동반자적 태도와도 같아요. 내가 아는 만큼 말하는 게 아니라 상대가 받을 만큼 말하는 것입니다.


“게임은 어떻게 만드나요?”에 대한 진짜 대답

이제 질문의 원래 자리로 돌아가보죠. 아이가 물었던 건 사실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아빠, 내가 지금 손으로 하는 이 ‘게임하기’라는 행동이 어떻게 세상에 튀어나오게 된 거예요?” 이걸 아이 눈높이로 풀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먼저 사람이 상상해요. “이런 게임을 하면 재밌겠다.” 하고 머릿속에서 그림을 그려요. 이걸 어른들은 기획이라고 불러요. 그다음 컴퓨터가 알아듣게 말로 바꿔요.


사람이 하는 말은 “몬스터가 나타나면 공격해”인데 컴퓨터는 그걸 못 알아듣잖아요. 그래서 컴퓨터가 이해하는 말, 즉 코드로 바꿔요. 그다음 눈으로 보이게 만들어요. 캐릭터가 어떻게 생겼는지, 버튼이 어디 있는지, 글자가 어떤 색인지. 이게 네가 좋아하는 UI예요.


마지막으로 사람이 만져봐요. 버튼을 눌러보고, 공격을 해보고, 점프를 해보고 “어? 이거 재밌다 / 별로다”라고 말해요. 그럼 다시 고쳐요. 이 네 단계를 인간학적으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상상(idea)

번역(code)

형상화(UI, 그래픽)

관계(플레이)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가 현실 세계로 흘러나올 때 거치는 층위와도 닮아 있죠. 머릿속에서만 있던 게 언어가 되고, 언어가 사물이 되고, 사물이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얻는 과정입니다. 아이는 사실 이 구조를 다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 하나만 이해하면 됩니다.


“아, 게임은 ‘사람이 하고 싶은 걸 컴퓨터가 알아듣게 바꾸는 일’이구나.”


이 한 줄만 들어가면, 나중에 중학교 때 스크래치나 파이썬을 해도, 고등학생 때 유니티를 해도, “아, 지금 내가 하는 건 사람-컴퓨터 통역이구나” 하고 이해합니다. 이게 바로 의미의 수호자가 해주는 일입니다. '이게 뭔지 모르겠는 상태'로 아이를 남겨두지 않는 것.


결국 교육은 ‘나를 설명 가능한 사람’으로 만든다

이 과정을 지나오면서 제가 느낀 게 하나 있습니다.

“아들에게 설명하는 연습이 결국 내 설명력을 키웠다.”


가족 안에서의 설명이야말로 가장 까다로운 설명입니다. 칭찬도 없고, 점수도 안 주고, 관심 떨어지면 그냥 딴짓해 버리는 청중 앞에서 이야기를 끝까지 끌고 가야 하거든요.


그 연습을 해두니까 소셜멘토링에서 학생들에게도 '게임 만드는 법'을 기술이 아니라 길로서 말할 수 있었을 겁니다.


“먼저 재미를 관찰하세요.”

“그다음 도구를 배우세요.”

“그다음 만든 걸 사람에게 보여주세요.”

“이 네 개가 반복되면 그게 게임 개발입니다.”


이렇게 말해주는 멘토는 많지 않다고 자부합니다. 대부분은 “C# 하세요, 언리얼 하세요, 포트폴리오 이렇게”에서 끝나거든요. 그런데 저는 '의미의 수호자'라는 개념을 마음에 두고 있어서인지 기술보다 맥락을 설명하는 쪽으로 가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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