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사람인가? 삶의 기록이 주는 서사의 힘

by 곽준원

심리학자 댄 맥애덤스는 우리가 단순히 기억의 묶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인생을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가는 존재라고 설명합니다. 이걸 내러티브 정체성이라고 부릅니다.


같은 사건을 겪어도 '난 늘 실패하는 사람이라니까'라고 기억하는 사람과 '그때 크게 넘어졌지만, 그 일 덕분에 삶의 교훈을 얻었다'라고 기억하는 사람으로 나뉩니다. 실제로 일어난 사실은 동일하지만, 그 사실에 어떤 의미를 붙여 하나의 이야기로 엮느냐에 따라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정의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댄 맥애덤스의 이론에서 삶을 기록하는 일은 단순한 일기 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흩어져 있던 기억과 감정, 선택들을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다시 엮어, '나는 이렇게 살아왔구나' 하는 자기 서사를 만드는 작업입니다.


내 삶이 스쳐 지나가는 느낌

어느 순간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하루가 끝나면 '오늘 뭐 했지..?'라는 생각이 종종 들었습니다. 출근하고, 코딩하고, 회의하고, 집에 와서 밥 먹고, 게임 잠깐 하다 보면 눈이 감기고 하루가 끝났습니다. 사진첩을 열어보면 카페 사진, 회의실 화이트보드, 가끔 지인들과 만나 찍은 사진, 가족과 함께 찍은 셀카 사진은 남아 있는데, 그때 내가 어떤 마음이었는지는 남아 있질 않았습니다.


그날 회의에서 왜 그렇게 예민했는지, 지인과 만나 웃고 떠들고 돌아오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던 이유가 뭔지, 가족과 함께 즐거운 식사를 하고도 무언가 마음이 불편했는지. 이런 것들은 사진도, 메신저 기록도 대신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역사를 쓴다는 것>에서 '자기 역사'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냉큼 책을 구입하고 읽어봤습니다. 자기 역사는 그냥 일기가 아니라, 내 삶의 의미와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 나만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작업이라고 말합니다.


책에서 언급한 여러 예시를 보면서 지금까지 먹고사니즘에 치여서 내 인생을 한 번도 이야기로 묶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책을 읽고 난 후에 느낀 점과 줄거리를 요약하는 노트를 꺼내어 지나간 추억을 떠올려 봤습니다.


노트를 펼쳐놓고도 한참 동안 아무 문장도 쓸 수가 없었습니다. 내 삶의 이야기를 써보려고 마음은 먹었는데 막상 펜을 들고 보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써야 할지, 아니면 대학 입시, 취업, 연애, 이직을 쓸지, 뭔가 특별한 사연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닌지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머릿속에서만 기승전결을 굴리다가 문득 책에서 읽었던 한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한 시점을 이미지로 떠올리고, 그때의 감정과 상황을 상단에서부터 하단까지 묘사해 보라는 글이었습니다.


여러 기억이 떠올랐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했던 하나를 골라 첫 문장을 써봤습니다. 첫 문장을 쓰고 나니 마치 단단하게 잠겨 있던 문고리가 조금 풀리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문장을 시작으로 저는 저의 서사를 만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기억이 감정과 연결될 때 일어나는 일

첫 회사에 입사하고 그 해 겨울은 유독 추웠습니다. 회사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 제대로 코드를 파악하지도 못했고, 할당된 업무를 빠르게 처리하지도 못했습니다. 회사는 당연하게도 바로 업무에 투입되어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사람을 필요로 하더군요.


매일 집에 돌아오면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 천장을 보면서 '아.. 나는 진짜 한참 부족한 사람이구나'라며 자기 비하에 빠져 지냈습니다. 그때는 그저 '내가 부족해'라는 생각이 너무나 막강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 그 시절을 글로 써 내려가 보니 다른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태어나서 처음부터 걷는 사람이 있을까'

'입사하고 1주일 만에 콘텐츠를 도맡아 구현하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부족한 사람'이기보다는 매일 전쟁터에 나가는 마음으로 버티던 사회 초년생에 가까웠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다르게 바라보는 관점이 생기면서 그 겨울의 제가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내러티브 정체성 이론에서 말하듯 그때의 경험에 다른 의미를 붙이는 순간, '나는 늘 부족한 사람'이라는 이야기에서 '나는 힘든 시기를 버텨온 사람'이라는 이야기로 조금씩 변화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막연히 '괴로웠던 시절'이 '그럴 수밖에 없던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해 버티던 나의 시기'로 재구성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자기 역사를 쓴다는 것>의 사례를 보면 대부분 직장에서 오랜 세월 일하고 은퇴한 노년분들의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그런 글을 보면서 '40대 중년이 된 내가 자기 역사를 쓰는 일은 너무 이른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지난 추억을 다른 의미로 바꾸고 싶다는 의지가 발동해 '자기 역사를 써보자'라고 마음을 먹었지만, 그저 평범하게 살아온 인생이라 생각한 나머지 쓸 만한 이야기가 없어 보였습니다.


전쟁을 겪은 것도 아니고, 회사를 창업해 대단한 성공을 이룬 것도 아니고, 드라마에 나올 법한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평범한 집, 평범한 학교, 평범한 회사를 다닌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삶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책에서는 위대한 업적이 없어도, 일상의 선택과 감정만으로도 충분히 하나의 서사가 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생각을 조금 바꿔보기로 했습니다. '대단한 사건'이 아니라 '감정이 크게 움직였던 순간'들을 떠올려보기로 한 겁니다.


'아버지가 반장이 되면 로봇 장난감을 사주겠다고 해서 거짓말로 반장이 되었다고 자랑한 초등학교 2학년'

'전 과목 합쳐서 5개 틀려서 올 수를 받았지만, 더 잘해라는 소리에 좌절했던 학창 시절'

'반액 장학금을 받아도 아무런 말도 없이 방으로 들어가셨던 아버지의 뒷모습'

'입사 5개월 만에 업무 스트레스로 인한 게실염으로 입원한 날'


이렇게 몇 장면을 적어놓고 보니, 그 사이사이가 선으로 이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타인에게 인정받으려고 굉장히 노력했고, 갈등을 피하려고 하다가 오히려 오래도록 마음에 상처를 남겨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거대한 사건이 아니라 작은 감정의 진동들이 제 인생의 방향을 조금씩 바꾸고 있었습니다.


과거의 나를 비판하기보다 이해하려는 태도로

글을 쓰면서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자기 비난'이었습니다. 언제나 부족하다는 생각이 뿌리 깊게 내려 지난 추억을 생각하는 과정에서도 생각의 틈을 비집고 자주 나타났습니다. 과거의 나를 데려와 세워놓고 '넌 왜 그렇게 밖에 못했냐'라고 심문하는 심판관처럼 글을 쓰게 되었고,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글쓰기는 자기 판단이 아니라, 자기 이해를 돕기 위한 도구라는 문장을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기준을 바꿔 보기로 했습니다. 예전 추억을 떠올리며 '왜 그랬을까. 정말 한심하다' 대신에 '그때 나는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까?'를 중심으로 생각해 봤습니다.


예를 들어, 열심히 일했던 직장에서 퇴사하고 저의 평가를 들었던 일을 떠올릴 때도 처음에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일했는데 같이 일하기 힘든 사람이라는 평가는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조금 더 솔직하게 적어보니 그때의 저는 '내가 생각하는 방식이 옳으면 너도 그렇게 해야 한다'라는 당위적 사고가 굉장히 강력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의 상황이 다른 만큼, 각자가 행동하는 이유는 다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걸 인정하려 하지 않았던 '경직된 사고'가 분명히 제 안에 가득했습니다. 이렇게 그때의 나를 이해해 보려는 시도가 나타났습니다.


내러티브 정체성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과정은 이라는'나도 모르게 타인에게 자신의 정의를 강요하는 사람'이라는 이야기에서 '각자마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음을 인정하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로 방향을 전환시켜 줍니다. 과거의 나를 비판하는 대신, '그때의 나에게는 그게 최선이었을지 모른다'라고 인정하는 태도, 삶을 기록할 때 가장 많이 연습해야 하는 자세입니다.


이렇게 '자기 역사'를 쓰는 과정에서 오래된 노트를 정리하였고, 몇 년 전에 적어 두었던 짧은 기록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3개월가량 일기를 작성한 시기의 글이었습니다.


어제 무리한 탓인지 오늘은 하루 종일 졸리고 무기력했다. 책도 제대로 읽지 못했고, 그나마 오전에 서평을 작성하여 겨우 발행했다. 오후에 늘어지게 낮잠을 잔 후 밖으로 나가 달렸다. 걷기와 뛰기를 번갈아 하며 6km를 완주했다. 나름 15일 넘게 꾸준히 지속해서인지 힘들지 않았지만 다리 근육, 허벅지 근육에 약간 무리가 왔다.


그날이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글을 읽는 순간 그날의 공기와 마음이 그대로 되살아났습니다. 아마 그 글을 쓰지 않았다면 그날의 무기력함을 이겨내는 방법이 그냥 또 하나의 '무기력한 직장인의 주말' 정도로 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삶을 기록한다는 건 마치 '이날, 이 시간, 이 마음으로 나는 여기 있었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처럼 기록된 이야기는 시간이 지나도 내가 누구인지, 나는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인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려주는 나침반이 됩니다.


그리고 언젠가 시간이 제법 흘렀을 때, 이 기록들을 다시 펼쳐보면 우리는 아마도 자신을 꽤 열심히 살아왔음을 실감할 수 있을 겁니다.




'자기 역사'는 거창한 자서전을 쓰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든 날을 다 복기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럴 수도 없습니다. 완벽한 연대기 순서를 맞출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지금 떠오르는 한 시점에서 시작해도 충분합니다.


어떤 날이 가장 먼저 기억에서 떠오르나요. 노트를 한 장 펼쳐 제목도 쓰지 말고, 떠오른 장면을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묘사를 해보세요. 이렇게 문장을 쓰고 나면 그 문장의 뒤를 따라오는 기억과 감정들이 조금씩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 겁니다.


그때 그 기억들에게 조용히 자리를 내어주고 있는 그대로 적어보는 것, 그 작은 시도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나의 삶을 기록하는 사람'으로 한 걸음 옮겨 서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언젠가 노트 몇 권이 쌓였을 때 내 인생의 추억들을 한 번에 펼쳐보며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알아차릴 수 있을 겁니다. 삶을 기록한다는 건, 결국 내 삶을 더 이상 방치하지 않겠다는 작고 단단한 약속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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