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최시현 지음 '부동산은 어떻게 여성의 일이 되었나'
빈손으로 결혼한 우리 부부는 월세를 전전한 끝에, 얼마간의 전세자금을 모을 수 있었다. 나는 이 소박한 성과에 알량한 자부심을 느꼈다.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순수 우리의 노동으로 만들어낸 것이었기에.
그 자부심이 깨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전셋집을 찾기 위해 부동산을 돌아다닐 때마다, 우리가 가진 돈은 손쉽게 초라해졌다. 비싸고 좋은 집은 얼마든지 많았지만, 돈에 맞는 집은 썩 맘에 들지 않았다. 가진 것은 없는데 눈이 계속 높아졌다.
형편에 맞게 사는 것이 옳다고 믿었던 나는, 중개사분께 우리가 가진 돈을 명확하게 밝히고 그 이상의 집은 보지 않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그 돈이 있으면 대출을 끼고 집을 살 일이지, 전세를 사는 게 말이 되냐’는 반문이 돌아왔다. 잠깐씩 어리둥절했다. 내가 이상한 건가.
노동으로 살려고 한 것이 잘못된 거였을까
결국 우린 빚을 내지 않고 아담한 다세대 주택의 전셋집을 찾았다. 하지만 거쳐야 할 난관은 또 있었으니, 엄마의 압박이었다. 엄마는 어렵게 종잣돈을 모았으니 전세가 아닌, 자가 소유의 집을 마련할 차례라며 나를 다그쳤다.
딸의 주거가 안정되길 바라고 하신 말씀이라는 걸 잘 알면서도, 가끔은 속이 상했다. 우리 부부의 노력과 성과가 한순간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것 같았다. 나는 소박한 자부심을 조금 더 느끼고 싶었지만, 지금 이 순간이 하루빨리 벗어나야 하는 임시적 상황으로 치부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돈이 없어서 집을 살 수 없다고 말하면, 엄마는 몹시 답답해했다. 빚 없이는 영원히 집을 살 수 없고, 안정된 삶을 살 수 없다는 거였다. 엄마는 ‘주거안정’을 말했지만, 내겐 곧 ‘빚내라’는 말로 들리기도 했다. 모녀간의 대화는 종종 곱지 않게 끝났다.
그게 5년 전 일이다. 나는 그 사이 달라졌다. 당장 부동산에 올인할 능력도, 배짱도 없지만, 틈틈이 집값을 확인한다. 그럴수록 예전에는 무리를 해서 살 수 있었던 집이, 이젠 무리를 해서도 살 수 없는 집이 되었다는 사실이 뼈아프게 다가온다.
그간 나는, 우리와 비슷한 여건으로 결혼 생활을 시작한 친구가 무리를 해서 집을 산 뒤, 수 억 원의 시세 차익을 얻는 것을 보았다. 뿐인가. 당시 엄마가 사야 한다고 지목했던 아파트들 역시 이삼억은 가뿐하게 올라가 있다. 이것이 당연한 일인지, 어안이 벙벙하다.
때가 탄 걸까, 이제야 현실감각이 생긴 걸까. 내 불안감은 커져만 간다. 급기야 투자가 아닌, 노동으로 모은 돈에 자부심을 느꼈던 것이 부끄럽기까지 하다. 내가 어디가 잘못된 건 아닐까. 버스도, 지하철도 있는데 굳이 두 다리 만으로 걷겠다고 생떼를 부린 건 아닌가.
이런 불안감을 안고 있던 때, <부동산은 어떻게 여성의 일이 되었나>를 만났다. 이 책 덕분에, 그간의 내 경험들이 오직 개인적인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부동산에 얽힌 정치 사회적인 맥락을 이해하니 뿌옇기만 했던 시야가 한결 밝아진 기분이다.
저자는 근대화 과정에서 성별 분업 이데올로기가 고착화되고, 경제 활동에서 소외된 중산층 여성들이 부동산 투자에 집중하게 되었음을 설명한다. 주거안정과 가족의 복지, 자산확장을 이루려고 했다는 점에서 ‘현모양처’와 ‘복부인’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국가는 가정 주부의 경제실천과 주택의 자가소유를 독려했지만, 부동산 투기가 문제가 되자 ‘복부인 담론’이 형성된다. 하지만 정작 투기 세력은 따로 있었다는 데서 여성혐오의 맥락을 읽을 수 있다. 한편, 여성들의 투자가 성공했다 하더라도 여성의 권익이 실현되기보다는 오히려 가부장적 계급구조를 공고히 했다는 분석이 시리게 다가온다.
책에 따르면, 국가의 주도하에 주택의 금융화가 이뤄지고 빚내서 집사는 것이 제도화된다. 신자유주의는 자가소유를 통해 가족의 안전과 복지를 스스로 구축해야 한다고 끝없이 암시한다. 그 속에서 현재와 미래의 노동까지도 모두 채무 이행을 위한 것이 된다.
투기적 주택 소유가 사회적 불평등을 고착시킨다는 것은 대부분 인정하지만, 운에 의해 결과가 달라지자 사람들은 투기를 비판하기보다 투기 욕망을 자신에게 투사하게 된다. 또한 주택을 소비하며 이득을 얻지 못하는 것은 곧 손해를 본 것이라고 느끼게 된다.
그리하여 집의 공공재적 성격은 희미해지고 투기에 참여한 사람은 물론,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끝없는 불안감과 소유욕을 떠안게 되었다는 것이다. 과연 이것은 옳은 일인가?
기성세대와는 다른 선택을 해보면 어떨까
저자는 질문으로 책을 맺고 있다.
"1982년에 초판이 발행된 <반사회적 가족>에서 배럿과 매틴토시가 제기한 것처럼, 가족은 왜 반사회적인가? 특히 집을 소유하려는 가족의 욕망은 왜 반사회적일 수밖에 없는가? 반사회적인 제도를 우리는 언제까지, 누굴 위해 존속시켜야 하는가? 언제나 질문은 주택이 아니라 가족을 향해야 한다."(292, 에필로그)
부실한 복지제도 때문에 나와 내 가족의 안전과 행복을 추구하고자 주택 소유를 욕망했던 이전 세대를 비난할 수는 없다. 나 역시 그 노력의 수혜자였기 때문에. 하지만 언제까지 계속 이런 일이 반복되어야 할까. ‘영끌’과 ‘패닉바잉’은 또다시 집값 상승을 바라게 되는 악순환의 고리가 아닌가.
생뚱맞지만, 얼마 전 개봉한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을 떠올려 본다. 주인공 피터 파커는 기성세대와는 다른 길을 택한다. 더 어렵지만, 충분히 가치 있는 쪽으로 향한 것이다. 어쩌면 우리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저자도 언급한 바 있듯, 국민은 국가 문화이데올로기의 적용대상이자 ‘주체’이기도 하다는 것을 기억하고 싶다.
얄팍한 마음을 가진 나는, 앞으로도 부동산 뉴스를 보며 속을 태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마음을 추슬러 본다. 보다 인간적인 삶이 무엇인지 여전히 잘은 모르지만, 끝없는 소유욕을 불태우는 것은 아니리라. 노동의 가치를 아는 이들과 따뜻한 교류를 지속하는 것,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아직도 나는 철이 없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