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해 주실 수 있나요?
'자랑'이라는 것은 우리의 일상에서 그리 반가운 단어가 아니다. 겸손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한국 사회에서, 자랑을 주고받는 상황이란 꽤 어색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자랑을 듣는 상황은 생각보다 자주 나에게 들이닥친다. 상대방의 자랑을 듣는 입장이란, 스스로 자처하지 않아도 불가피하게 겪게 되는 것이다. 그 이후 따라오는 불편함 역시 피할 수 없다. 설령 상대방이 의도치 않게 뱉어낸, 자랑과 엇비슷한 말 한마디일지라도 그것이 주는 여운은 꽤 길다. 그런 상황들을 겪고 나면, 자신은 언제나 겸손하게 행동할 것이라 다짐한다. 그러나, 생각보다 그것은 고된 노력이 필요한 다짐이다. 나조차도 무의식 속에, 타인에게 자랑하고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을 품고 있다. 이것을 부인한다면 거짓말이겠다. 그리고 나뿐만이 아닌,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이 말들을 삼키려 고군분투한다. "나 이런 사람이에요", "내가 이걸 해냈어요", "내 부모님은요...", "나랑 친한 사람이..." 등등 참 다양한데, 결론은 곧 하나다. "어때요? 나 좀 대단하죠?"
자랑이라는 행위에 대하여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대표 소재는 '뚜렷한 결과물'이었다. 좋은 학교를 나왔다거나, 좋은 직장에서 근무한다거나, 아니면 어떠한 시험에 합격했다는 이야기들. 자신이 노력하여 얻어낸 '타이틀'에 대하여 남들에게 들어내어 말하는 것을 나는 '근거를 가진 대표적인 자랑의 예시'라고 여겼다.
그러나 수많은 인간관계를 접하며 느낀 것이 있는데, 이러한 소재만이 자랑거리로 인용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자랑의 소재는 생각보다 쉽게 찾아낼 수 있다. 자신이 노력 없이 얻은 선천적인 무언가, 또는 높은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 그 행위 자체 또한 누군가에게는 충분한 자랑의 소재가 될 수 있다. 이러한 것들로 자신의 가치를 높이려는 사람들은 살아가며 꽤나 쉽게 마주하게 된다. 부모님의 재력과 가정환경, 유전적인 신체의 특징,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높은 목표와 그것으로 창조한 스스로의 가능성과 같은 것들. 수많은 것들이 자신을 내세울 수 있는 소재로 인용된다.
인용의 방식도 참 다양하다. 직접적으로 내뱉는 것뿐만이 아니다. 간접적인 행위와 우연을 가장하여 드러나기도 하고, 흘러가는 말처럼 들리도록 의도되기도 한다. 어쩌다 이야기의 흐름이 그러한 방향으로 흘러갈 때도 있고, 심지어 자신조차 그것이 타인에게 자랑으로 여겨졌을 것이라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나는 그것들이 마치, ‘나를 알아주세요'에서 시작하여, '알아주는 김에, 인정도 해주시겠어요?'라는 결론으로 향하는 것처럼 읽힌다. 어떠한 소재를 어떻게 인용하든, 그것들의 목적은 결국 ‘인정’인 것이다.
자랑이라는 행위의 뒤에는 늘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깔려있다. 당신에게 자신을 과시했던 그 사람은, 단순히 우쭐대고자 하는 목적만을 가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금 더 깊게 본다면, 인간의 진화적 배경도 분명 이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현대 사회의 현상이나 개개인의 성격을 떠나, 과거부터 인간은 스스로 사회적 지위를 얻어내고, 이로 인해 안정적인 소속감을 얻어야만 생존할 수 있었다. 인정받지 못하면 소외되고, 소외는 곧 생존에 치명적인 위협을 불러온 것이다. 더 나아가, 인간은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리기 위해 '경쟁자들' 속에서 자신을 돋보이기까지 해야 했다. 마치 공작새가 화려한 깃털을 과시하는 것과 같다.
그로 인해 인간은 능력, 미모, 성격, 가치관과 같이 다양한 자원을 '자랑'함으로써, 자신을 선택받을만한 존재로 드러내기 위해 애써왔다. 그러한 생존 방식들은 여전히 현대의 사회에서 존재한다. 인정받지 못하거나 소속되지 않는 것이 생존에는 그다지 지장을 주지 않지만, 자신의 가치를 끊임없이 알리고 돋보이고자 하는 욕구는 아직도 인간의 내면에 숨 쉬고 있다.
그렇다면 결국, 자랑이라는 행위는 '나는 존재해도 되는 사람이다'라는 말의 증명과 확인의 과정이지 않을까. "이만큼 했으니, 나도 잘 살아갈만하지 않나요?"라고 조심스레 물어보는 셈이다. 나의 존재를 알리고, 이에 마땅한 가치를 증명하고, 앞으로의 존재를 영위하고자 하는 인간 나름의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환경과 시기, 어떠한 사건에 따라 자아는 쉽게 동요한다. 그러기에 인간은 불완전함에서 태생된 불안을 지니고 살아간다. 그것을 견디기 위해 타인의 인정을 근거로 자신을 세우려고 한다. 자신의 존재를 타인이라는 거울로 끊임없이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자랑이 나쁜 의도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도, 상대방의 자랑에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은 여전하다. 상대가 자신을 드러내서가 아니다. 그 불편함을 일으킨 감정들 중에, 분명 '불안'이라는 감정을 느껴본 적이 있지 않은가. 상대방의 자랑은 종종 나의 미완을 주목하게 한다. 그 불편한 상황은 종종 나를 상대방보다 뒤처졌다고 느끼게 만들고, 그로 인해 비교하며, 스스로 움츠러들게 한다. '상대방에 비하여 나는 괜찮은가?', '더 노력해야 하는 건가?', '인정받을 수 없는 건가?' 이러한 생각들은 자신의 내면을 끊임없이 흔들어댄다. 이러한 혼란은 결국, 상대방의 자랑에 대하여 자신을 공격하는 무언가로 인식하게 만든다. 이로 인해 생겨난 불편함은 상대방에게 더욱 겸손할 것을 강조하고, 더 나아가 상대방을 깎아내리며 비판한다. 과도한 자랑은 스스로 조절하는 것이 맞겠지만, 상대방의 말을 조금 더 들어주고 인정해 주는 자세 또한 중요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상대방을 인정하는 여유는, 자신의 불완전한 자아를 인정할 줄 앎에 있어서 드러난다.
모든 이들이 상대방의 자랑에 쉽게 혼란을 느끼고 동요되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자랑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을 잃지 않는 이들이 분명 존재하는데, 그들은 자신의 방향을 명확하게 한다. 타인과 자신이 존재하는 환경과 방식이 분명하게 다름을 안다. 거울을 너무 오래 들여다보지 않는다.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고, 그저 관찰하는 태도만을 유지한다. 그렇게 타인이 가진 것들을 온전히 인정하고, 그것들을 관찰하며, 자신의 성장에 도움이 될만한 것들은 정성을 들여 배운다. 자신이 자신을 알아주기에, 굳이 타인을 비판하고 스스로를 나서서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 나는 그들이 가진 여유와 너그러움을 사랑한다. 관계가 깊어질수록 조금씩 발견되는, 그 노력의 산물들을 존경한다.
인간관계에 있어 가장 심오한 원칙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갈망이다 - 윌리엄 제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