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건 아니에요
나는 다정한 사람들을 좋아한다. 그들은 상대방을 편하게 해 주기 위해 매 순간 고민하고, 말투 하나과 표정 하나에도 세심한 정성을 담는다. 다정을 싫어하는 이들은 없다. 그러나 다정은 의도하지 않은 오해를 만들고는 하는데, '이 사람이라면 괜찮겠지'라는 안도감이 그 원인이다. 다정한 사람은 언제나 웃음을 보이며, 어떠한 무례에도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진 채 조용히 넘어갈 것이라 생각한다. 다정을 받으면 다정으로 보답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이들이 있다. 다정의 뒤에는 끝없는 인내가 있으며, 쉽게 가늠할 수 없는 내면이 머문다.
다정함은 단순한 성향이나 성격 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치밀한 계산, 수차례의 고민으로부터 선택된 결과물이다. 다정하려는 사람들은 상대방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끊임없이 상황을 관찰하고, 상대의 말투와 표정, 행동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읽어낸다. 겉보기에 자연스러워 보이는 말 한마디와 행동조차, 상대의 감정을 존중하기 위해 수차례 다듬어진 결과물이다. 그들은 상대에게 당장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자신의 일방적인 의견과 감정을 굳이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다. 늘 '상대'를 중심에 두고 행동하며, 그 입장이 되고자 노력한다. 어떠한 말이 누군가의 감정을 해치고 위축시킬 수 있다는 것을 민감하게 감지한다. 이러한 태도는 단순한 선(善) 뿐만이 아닌, 높은 지능과 통제력에서도 비롯된다.
인간은 본래 자신을 표현하고 드러내고 싶어 하는 본능을 갖고 있다. 인정받고 싶고, 이해받고 싶은 욕구는 인간이라면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다정한 이들은 이것을 일정 부분 억누르려는 경향이 있다. 단순히 감정을 숨기는 것과는 다르다. 자신과 상대방이 처한 상황을 정확히 읽고, 자기표현의 타이밍과 방식을 매 순간 신중히 선택한다. 일방적인 의견과 감정을 즉각적으로 표출하는 것보다, 잠시 인내하는 것이 추후 더 좋은 영향을 이끌어낸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다정은 결국, 자신을 적절히 통제하고 관계의 균형을 고려할 줄 아는 사회적 지능의 산물이다. 그것은 단순한 희생이 아니라, 당신과의 더 나은 관계를 위해 기꺼이 감수하는 고도의 전략이기도 하다. 그 전략은 경청과 기억, 리액션과 같은 것으로 드러난다.
다정한 이들의 곁은 편안하다. 어떤 말도 거부당하지 않을 것 같고, 나의 말을 끝까지 들어줄 것만 같으며, 때로는 실수나 무례조차도 웃으며 넘어갈 것 같은 여유가 느껴진다. 다정은 경계를 허문다. 더 나아가, 상대에게는 그 경계를 넘어도 된다는 용기가 주어진다. '저 사람은 원래 착하니까', '이 말을 해도 괜찮겠지?' 같은 생각이 그 용기의 예시들이다.
유감스럽게도, 그런 생각들은 다정한 이들에게 금세 읽힌다. 그들은 평소에도 상대를 유심히 살피고, 미세한 눈치와 감정을 섬세하게 읽어내는 것에 숙달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상대를 존중하기 위해 모든 것들을 섬세하게 조율하듯, 그 반대의 무례함 또한 빠르게 감지한다. 타인이 던지는 말이 진심인지, 무심함에서 비롯된 습관과 같은 것인지, 혹은 얄팍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인지. 그들은 대부분 알고 있다. 다만, 모르는 척하며 넘기는 것이다. 불쾌함을 느끼지 못해서가 아닌, 불필요한 갈등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은 그 관계를, 그 사람을 지키고 싶은 것이다.
인간이기에, 그 인내는 무한하지 않다. 오히려 다정한 사람일수록 자신을 잘 알며, 스스로의 한계를 분명히 알고 있다. 경계를 더욱 명확히 세워두는 것이다. 다정함은 타고난 성향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갈고닦는 기술과 같다. 기술을 습득하는 것은 끊임없는 인내와 훈련이 필요하다. 받고 싶은 만큼 더 주고, 말하고 싶음에도 더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대부분 안다. 그러나 그 노력을 진심으로 알아봐 주는 사람은 드물다. 시간이 흘러 상대가 그 경계를 넘게 되는 순간, 다정을 노력하던 이들은 조용하고 단호하게 그 관계에서 물러선다. 애정이 없어서가 아니다. 이미 충분히 애썼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자신의 다정을 다정으로 돌려준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또다시 다정을 건넨다.
다정한 이들에게는 다정함이 무기로 쓰이지 않는다. 오히려 무기처럼 보이지 않도록 애쓴다. 감정을 조절하고, 상황을 살피고, 자신을 덜어내면서까지 상대를 챙긴다. 어떤 날은 말 한마디로 상대의 긴장을 풀어주고, 상대가 원하는 칭찬을 자연스럽게 건네며, 또 어떤 날은 침묵으로 상대의 마음을 지켜준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자존감이 높기에 다른 이들을 높일 수 있다. 자신이 갈고닦아온 내면이 강하기에, 다른 이들을 포용할 수 있다.
그들은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의 중요성을 알고, 즉흥적인 반응보다 '상황을 가리는 반응'이 때론 더 현명하다는 것을 안다. 나의 시선에서 본 그들은 강인하다. 관계를 위해 자신의 감정을 깎아내며 홀로 묵묵히 인내한다. 다정함이 계산과 조율에서 비롯된다는 말은, 그들이 거짓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진심이고, 진중하며, 진득하다. 그래서 그들의 다정함이 너무 오래, 혼자만의 사투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적자생존은 틀렸다. 진화의 승자는 최적자가 아니라, 다정한 자였다. - 최재천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