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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아직 거기에 계세요?

과거의 관계에 머무는 사람들

by 소정


미련

: 깨끗이 잊지 못하고 끌리는 데가 남아 있는 마음

누구나 많은 것들을 놓치며 살아간다. 이루고 싶었던 목표, 얻고 싶었던 명예와 같은 것들. 그리고 더 나아가, 끝까지 지켜내고 싶었던 여러 관계들. 내가 더 잘했더라면, 조금만 더 소통을 했다면, 혹은 우리가 조금 더 늦게 만났다면 달라졌을까. '사람'과 관련된 미련은 끝없는 가정을 불러일으키고, 근거 없는 해석을 유도하며, 스스로를 자책하게 만들고는 한다. 끝나버린 관계를 과거와 함께 흘려보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 관계를 오래도록 곱씹고 회상하는 이들 또한 존재한다. 왜 이렇게 오래 멈춰서 있는 걸까. 그렇게 내가 한동안 바라보는 것은, 과거의 당신일까. 아니면 나 자신일까.




01 끝난 관계를 왜 놓지 못하는지


오랫동안 정성을 들인 관계가 끝이 났다. 그러나 그 후에도, 관계는 끝나지 않을 것만 같다. 일상 속에서 문득 떠오르고, 원치 않은 감정들이 불쑥 튀어나온다. 처음엔 그 사람이 그리운 줄만 알았다. 그러나 시간은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상기시킨다. 생각해 보니 그 사람을 그리워한 건 아닌 것 같다. 그 사람의 외모와 말투, 표정과 같은 것은 기억조차 흐릿해진다. 그러나 선명히 떠오르는 것은, 그 사람과 함께했을 때의 나였다. 그 시정 나는 조금 더 따뜻했고, 단단했으며, 그 무엇보다 온전히 살아 있다고 느꼈다.

인간은 수많은 관계 속에서 자신을 구축해 간다. 누군가의 눈에 비친 나를 통해, 누군가가 나를 대하는 태도를 통해, 평소에는 알지 못했던 자신의 새로운 일부를 마주한다. 그 사람 앞에서만 나올 수 있었던 습관, 말투, 철이 없어 보였던 행동과 같은 것들. 그것들은 내가 이상적으로 원해왔던 자아의 일부이기도 했다. 누구나 사랑을 받고 싶고, 관심과 배려를 받고 싶으며, 때로는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려도 포용받기를 원한다. 그 모든 것들을 단순한 이상이 아닌, 현실로 마주할 수 있게 해 준 관계를 끝낸다는 것. 그것은 단지 한 사람만을 놓아주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으로 인해 실현될 수 있었던, 정든 나의 일부도 함께 놓아주어야만 한다.

결국, 끝난 관계에 대한 미련은 단순한 감정의 여운이라고 하기엔 어렵다. 그것은 그 시절 더 나았던 것만 같은 자신의 모습을 잃었다는 상실감이자, 그 모습을 다시 마주할 수 없다는 박탈감이다. 과거에 머무는 나의 일부를 놓지 못한 채, 현재의 내 모든 것을 한탄하게 된다. 이것은 마치 그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 같지만, 실은 그 사람 곁에서 실현될 수 있었던 자신의 이상을 애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02 여전히 존재하다


잃어버렸다고 느끼는 것은 사람이 아닌, 그 관계 속에서 실현되던 나의 이상적인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잃는 것은 결국 내 존재의 일부, 혹은 모든 것이 부정당한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이어 그것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것을 관계의 실패로 치부하고, 그 관계를 지켜내지 못한 스스로를 자책한다. '내가 더 잘했어야 했는데', '조금 더 이해해 줬다면'과 같은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결국 그 미련은 내면 어딘가에 얹힌 돌처럼 자리를 잡는다. 그 시절에만 마주할 수 있었던 나의 이상적인 자아, 그것을 더 이상 마주할 수 없을 거라는 그리움이 드리운 채 말이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관계의 실패라는 것이 곧 자신의 실패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자아는 단단히 고정된 비석과 같은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흐르고, 변화하며, 그 일부가 잠시 모습을 감췄다가 이내 더 만족스러운 형태로 자신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 시절, 그 관계에서만 실현될 것 같던 나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내 안 어딘가에 조용히 머문다. 이내 스스로를 위해 쌓아 올리는 경험과 노력, 그로 인한 성취들 속에서 다시금 형태를 갖출 것이며, 그토록 그리워하던 나의 '이상적인 자아'라는 것이 언젠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 단언한다. 더욱 따뜻하고, 단단하며, 온전히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 줄 모습으로, 그리고 그것을 실현시켜 줄 타인 또한 필요로 하지 않은 자유를 지니고서. 이제 그것의 실현은 온전한 나 자신의 영역인 것이다.



나는 뿌리내리고 있으나, 흐른다 - 버지니아 울프 'To the Lighthouse'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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