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당신도, 그들도
우리는 보통 타인에게 직설적인 비판을 쉽게 내뱉지 않는다. "너 왜 그렇게 살아? 너무 한심해.", "너 너무 개인주의야.", "시끄러우니까 조용히 좀 해줄래?"와 같은 말들이 목까지 차올라도 애써 참아낸다. 타인을 불편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자신에 대한 적대적인 분위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간혹 이미지 관리에 무심한 사람들은 그런 말들을 거리낌 없이 내뱉을 수 있지만, 대다수는 그리 용감하지 않다. '그래, 그럴 수 있지.' 라며 속으로만 중얼거린다. 그러나 위와 같은 비판들이 자신을 향한다면 주저함이 없어진다. "나 너무 한심한 것 같아.", "내가 너무 개인주의인가?", "나 너무 말이 많았나?" 이처럼 타인에게는 조심스러웠던 말들이, 나 자신에게는 서슴없이 쏟아져버린다.
삶을 살아가며 겪을 수 있는 실수와 실패, 미완의 순간들을 예측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더군다나 이것들은 동일한 조건에서만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누군가는 많은 노력 끝에 실패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우연히 성공을 얻는다. 평생을 베풀고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이 원치 않은 누명을 쓰게 되고, 수많은 비리를 저지른 사람이 명예를 얻기도 한다. 개개인의 고유한 입장은 그들 각자의 삶에서만 읽힐 뿐, 다른 이들은 그것을 제대로 관측하지 못하고, 딱히 관측하려 하지도 않는다. 이 말은 나와 당신에게도 해당된다. 나의 사연을 정확히 알아주는 것은 나 자신이며,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도 나 자신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오리가 물속에서 얼마나 열심히 다리를 젓는지 보지 못한다.
원치 않은 결과물, 상황 그리고 예상 못한 실수를 맞닥뜨린다는 것은 결코 달갑지 않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노력을 무마시키는 것만 같고, 스스로의 실력을 부정하도록 만든다. 그럴 때 드는 생각이 있다. '나는 왜 이리 한심하지?' 스스로를 서슴없이 비판하고 깎아내린다. 자신의 사연과 노력, 내면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을 적대시한다. 그럴 때 한 번은, "그래, 그럴 수 있지" 라며 자신을 너그럽게 이해해 주는 것은 어떨까.
세상은 결코 누구의 뜻대로도 움직이지 않는다. 나의 뜻도, 당신의 뜻도 세상 앞에서는 철저히 외면당한다. '반드시 이번 시험에서 합격할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이에게 사랑을 받아야 하는 사람' 또한 존재하지 않으며, '반드시 성공할 사람'도 마찬가지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인물을 믿음으로써 스스로에 대한 실망과 비판이 생겨나게 된다.
나는 이번 시험에서 합격하지 못할 수도 있으며, 모든 이들에게 사랑받지 못할 수도 있다. 노력에 비하여 결과물이 만족스럽지 않을 수도 있으며, 어이없는 실수를 하고, 원하지 않은 오해를 살 수 있다. 나의 아이는 천재가 아닐 수도 있으며, 모든 이들이 이 아이를 이해해주지 않을 수 있다. 나의 삶이 내일 갑자기 뒤바뀔 수 있으며, 이것이 긍정이든 부정이든 나는 결코 관할할 수 없다. 이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한계이며, 세상이 그 누구의 뜻에도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나는 완벽하지 않으며, 아직 부족한 인간'이라는 것을 받아들인, 즉 스스로에게 너그러운 이들은 자신의 실수와 실패, 잘못을 더욱 쉽게 인정한다. 동시에 이들은 타인의 실수와 실패, 잘못에 있어서도 너그러운 태도를 가질 확률이 많은데, 이것은 영국의 출판사 Taylor & Francis에서 발행하는 국제 학술지인 《The Journal of Positive Psychology》에 실린 한 연구(Welp & Brown, 2014)에서 다루어졌다.
해당 연구 내용에 따르면, 자신에게 아주 높은 기대치를 요구하고, 작은 실수조차 용납하지 않는 '완벽주의자'들은 타인에게도 자신과 비슷한 높은 기대치를 설정한다. 이것은 애초에 비현실적인 기대치이며, 타인이 이것을 만족시킬 가능성은 아주 낮다. 따라서, 완벽주의자는 타인에게 더욱 쉽게 실망을 하고 부정적인 평가를 뱉으며, 타인을 더욱 괴롭게 하는 행동 양상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에게 너그러운 이들은 이와 다르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으며, 아직 부족하기에 실수와 실패 또한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기에 인간의 한계를 직면하고, 타인에게 비정상적이고도 비현실적인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다. 세상은 그 누구의 뜻에도 귀 기울이지 않기에, 타인이 자신을 만족시켜 줄 것이라 단언하지 않는다. 나를 만족시키지 못한 사람이, 또 다른 누군가를 만족시킬 수 있다는 사실도 인정한다. 그렇게 그들은 타인의 부족함과 실수를 너그럽게 포용한다. 자신도 원치 않게 그러한 상황들을 마주했고, 마주할 것이다. 또한 자신의 힘으로 그것들을 만회하길 원할 것이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타인도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여전히 이 말을 좋아한다. "그래, 그럴 수 있지." 이것은 나와 타인을 한계로 몰아넣지 않으며, 어떠한 사건에 대해 과도한 생각을 하지 않도록 돕는다. 동시에 잘 알지도 못하는 이들의 사정을 함부로 평가하지 않으며, 괜한 오지랖을 부리지 않게 해주는 것에도 한몫을 한다.
그러나 이 말이 위와 같은 선한 영향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이 너그러움이 언제 멈추어야 하는지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나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을 만큼만, 그리고 나 자신이 너무 안일해지지 않고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만큼만. 동시에 누군가가 본인에게 주어진 책임을 회피하지 않을 만큼만. 그 경계선을 지켜가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나와 타인에 대한 너그러움의 목표는, 결국 나와 타인의 삶을 더욱 건강하게 하고자 함이기 때문이다.
결국 세상은 그 누구의 뜻에도 귀 기울이지 않고, 그 누구도 만족시켜주지 않는다. 그런 세상에서 어떻게 타인이 노력만으로 나를 만족시켜 주겠는가. 나를 만족시키기 위해 태어난 것은 없고, 나조차도 나를 만족시키기 못한다. 설령 누군가 자신을 만족시켰다고 해도 그것은 찰나의 우연일 뿐, 그 우연을 기준으로 세상이 본인을 위해 맞춰줄 거라 생각한다면 오만이다. 그 오만은 자신을 위해 노력하는 이들조차 지치게 만든다.
나도 누군가를 만족시키지 못할 수 있다. 타인의 부족함, 실수, 실패의 가능성은 나에게도 충분히 존재할 수 있다. 내가 포용받길 원하는 것처럼, 타인도 포용받길 원할 수 있다. 그래, 그럴 수 있는 것이다.
자기 비판은 당신이 좋은 사람인지를 따지는 반면, 자기 자비는 무엇이 당신에게 좋은지를 따진다.
- 심리학자 '크리스틴 네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