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주는 사람, 늘 받는 사람
어렸을 적, 아이들이 즐겨보던 만화에서 묘사되는 우정이란 늘 따뜻하고 진실했다. 주인공과 친구들은 '정'이라는 것 하나로 서로를 지켜주었으며, 베푸는 것에 인색하지 않고, 그저 '친구'라는 역할에 충실했다. 많은 이들이 그런 관계를 동경하며 어른이 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어른이 된 후 깨달은 것은, 그런 관계는 생각보다 흔하지 않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자신을 지켜주는 관계들을 위해 기꺼이 베풀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타인에게는 지갑을 닫고 자신에게는 너그럽다. 무언가를 바라고 준 것도 아니지만, 덥석 받고는 아무 말 없이 침묵하는 태도에 서운함이 쌓인다. 자신의 손해가 싫어 관계 유지를 위한 노력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있다. 주는 건 무조건 순수해야 한다며, 받는 입장에서는 굳이 갚을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 동시에 그들이 이중적인 것은, 그 관계가 계속 유지되길 바란다는 것이다.
관계에서 주로 '주는 사람'이라는 역할을 자처하는 이들은,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베푸는 것일까? 언뜻 보면 그렇다고 믿고 싶지만, 실제로는 관계 속 '조건 없이 주는 행위'조차도 약간의 기대와 감정적 계산이 가미되어 있다. 그 계산이라는 것은 물질적인 계산이 아니다. 고맙다는 진심 어린 말 한마디, 주도적인 노력, 혹은 정성이 담긴 사소한 보담처럼 아주 인간적인 반응들인 것이다.
그래서 아무 말 없이 받기만 하는 상대에게는 어느 순간부터 서운함이 쌓인다. 그 서운함을 나타내면, '받는 사람'을 자처하는 이들의 반응이란 늘 비슷하다. "달라고 한 적 없는데 왜 그래?", "네가 주고 싶어서 준 거잖아." 심지어 정성을 들여 준비한 무언가에 "이건 내 스타일이 아닌데"라는 말까지 뱉어낸다. 그리고는 농담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들은 상대방을 침묵하게 만든다. 더 이상 이 관계를 위한 손해를 감수할 마음이 사라진다.
물론, 상대방이 먼저 줬다고 해서 반드시 어떠한 보답이라도 보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단, 이 관계가 어느 날 갑자기 단절되어도 상관이 없다면 말이다.
사람은 관계에서도 손익을 따진다. '받는 사람'이 손해를 보기 싫어 먼저 베풀지 않는 것처럼, '주는 사람'도 아무런 반응이나 보상 없이 계속해서 손해만 보는 관계를 원하지는 않는다. 사회학과 심리학에서는 꽤 오랫동안 이 내용을 다루어왔는데, 이것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개념이 바로 '사회교환이론(Social Exchange Theory)’이다. 인간의 사회적 상호작용을 경제적 교환과 유사하게 설명하는 이론으로, 인간은 타인들과의 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보상과 비용을 따지고, 이에 따라 관계를 지속하거나 종료하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 이론과 연결하여 생각해 본 것이 두 가지가 있다. '받는 사람'이 관계 속에서 가지는 심리와, '주는 사람'이 손해를 감수하며 베푸는 이유에 관한 것들이다.
먼저,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였을 때, 그들의 행동은 일종의 '가성비'라고 할 수 있다. 노력이라는 비용은 줄이면서, 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극대화하려 한다. 물질적 또는 감정적 보답, 시간, 노동을 덜 들이고도 상대방의 관심과 애정을 받는 것을 선호하는 셈이다. 그들이 취하는 '주고 싶어서 줬으면서, 내가 왜 보답해야 하지?'라는 태도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해야 할 노력을 피할 수 있는 꽤 효율적인 방식이다. 더 나아가, 상대방의 호의를 평가하고 폄하하기도 한다. "이건 맛이 좀 별로네", "카페인 없으니 이건 특별히 마실게~" 이러한 말들이 예시이다. 이것들은 마치, 자신에게 부담이 되는 '심리적 비용'을 회피하려는 방어기제와 같이 보인다.
반면, '주는 사람'은 단순히 손해를 감수하는 것에 특화된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정서적인 차원에서 투자한다. 물질보다는 관계, 진심, 지속 가능성을 중요시한다. 미래에 대한 투자 가치를 크게 평가하는 것이다. 상대방과의 관계를 '유지할만한 가치가 있는 관계'로 만들고 싶기 때문에, 먼저 투자하고 노력한다. 이러한 자신의 노력으로 서로에 대한 신뢰와 믿음, 존재의 비중이 커지길 바란다. 자신이 손해를 봄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관계를 지속시기는 밑거름이 되길 바란다. 그러나 그들 또한 보상을 원하게 되기 마련이다. 이 정서적인 투자는 이 관계에서 자신도 상대방에게 의미 있는 존재로 확인받길 원하는 '감정적인 보상'을 원하게 되는데, 결국 이 보상이 돌아오지 않으면 자신이 투자한 것들에 대하여 회의감을 느끼게 된다.
결국 사람과 사람의 관계라는 것은 일방적인 호의만으로는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늘 먼저 주는 사람도 감정적인 보상과 상호적인 노력을 기대하게 되며, 받는 사람 역시 그 관계가 지속되길 원한다면 언젠가는 어떤 방식으로든 응답해야 한다. 그것이 어렵다면, 최소한 상대방의 베풂을 정중히 거절할 줄은 알아야 한다. 조건 없이 베푸는 행위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서나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편이 낫다. (*사실 부모가 자식에게 베푸는 행위 또한 조건을 가진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에서, '친족 선택(Kin selection) 이론'으로 설명된다. 자식이 잘 살아야 부모의 유전자가 퍼지게 될 것이며, 따라서 부모가 자식에게 투자하는 것은 손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순수한 사랑'이라고 느끼고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의 관계가 아닐까. 마치 인간은 조건이 있는 사랑임에도, 조건이 없는 것처럼 느끼며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인 것만 같다. 그게 인간의 역설이자, 아름다움일 수도 있고.) 인간은 그 누구도 손해만을 감수하며 관계를 지속하려고 하지 않는다. 직장 동료, 친구, 연인 그리고 배우자 등 대부분의 인간관계에서 적용되지 않을까 싶다.
처음으로 먼저 베푸는 행위는 정서적인 연결을 위한 첫걸음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관계를 오래 지속시키고 싶다면, '받기만 하는 태도'만 유지해서는 안된다. 관계는 시소와 같다. 그것을 계속 즐기고 싶다면, 서로의 뜀박질이 반드시 필요하다. 어린 시절, 친구와 시소를 탔던 순간을 떠올려보자. 친구와 번갈아가며 뜀박질했던 탓에 다리와 엉덩이가 제법 아프기는 했지만, 마주 보며 웃어대던 그 순간은 참 즐거웠다. 시소에서 내리는 것이 마냥 아쉬워, 작은 발로 더 열심히 뛰어댔었다.
누구도 자신이 받은 것으로 인해 존경받지 않는다. 존경은 자신이 베푼 것에 대한 보답이다.
- 캘빈 쿨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