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없으니 회사도 의미없어.
올해 20주년을 기념하여 퇴사를 하겠단다.
그 긴 시간을 묵묵히 집과 회사만 오가던
지독히도 단조롭고 성실한 아이다.
가족을 제외하고는 친구라 부를 존재도 별로 없고,
모든 소비는 기능과 가성비부터 따져대는 아이다.
동생은 '우울해서 빵을 샀어'류의 말을 한 적이 없다.
감정적으로 사표를 내던질,
그런 대책없는 놈이 아니었단 말이다.
그런 말이나 행동은 내 몫이어야 했다.
프로젝트마다 회사도 직업도 갈아치우고,
감성을 그럴듯하게 포장해 밥벌이를 하고,
사람들과 새벽까지 우르르 몰려다니는데다,
(비교적 젊을 때까지이며 지금은 아니지만)
확고한 취향을 따라 금액 불문 소비를 일삼는,
감성적이다 못해 감정적인,
내 입에서나 튀어 나올 만한 말이었다.
그럼 그렇지.
이내 앱을 열어 이것 저것 보여주기 시작했다.
굳이 이런 것까지 확인시켜 줄 필요는 없는데.
세 개의 알파벳으로 된 계좌들(왜 다 그럴까?),
ETF들(이것 마저!)이 만들어 내는 현금흐름에
세금 계산까지 마친 포트폴리오 운영 계획까지.
엑셀 시트도 GPT와의 전략 논의 창도 있었다.
그러니, 경제적 자유를 이룬 파이어족이란다.
미래에 대한 막막함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다.
엄마와의 작별 이후, 이미 많은 것을 알아버렸다.
'지금', '그대로'만으로도 충분하다.
다만, 슬쩍 농담처럼 지나가버린
첫 문장이 가시처럼 걸려 남아 있었다.
며칠 내내 신경 쓰였다.
간지러운 게 대수라고 아무 대꾸도 못했나 싶어졌다.
그때 무슨 말이 필요했을까.
지금이나마 어떤 말이 필요할까.
말이라는 것이 필요하기나 할까.
나는 언제까지 동생을 걱정하는 사람으로
남아 있을 생각이었을까.
묵묵히 버텨온 동생의 그 긴 시간처럼
나도 그렇게 그저 옆에 있어주는 것 외에
뭘 더 할 수 있었을까.
엄마가 곁에 있었다면 달랐으려나?
지금 우리는 그 번역기를 잃어버렸고,
그 대신 할 수 있는 거라곤,
아무 말 없이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따뜻한 밥 한 상 차려 먹는 것이 전부일테니.
그러니 그만하기로 한다.
카레는 그만하자.
제육볶음이나 곰탕으로 메뉴를 격상시켜야겠다.
이것들로 지난 20년의 수고를
보상해줄 수 있을런지 모르겠지만,
일단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게 해주고 싶었다.
게다가 엄마 없이 보내는
우리의 첫 명절을 풍요롭게 보내고 싶었다.
많이도 샀다.
전 삼총사도 샀고, 고기도 종류별로 샀고,
떡볶이를 해먹어야 하니 떡도 오뎅도 샀고,
곰탕 수육에 곁들일 부추무침 재료도 샀고,
명절이라고 먹지 말란 법 없는 파스타도 샀고,
아빠가 좋아하시는 귤도 곶감도 약과도 샀다.
접이식 카트가 차고 넘칠 정도로
전통 시장과 대형 마트를 넘나들었다.
돌아온 집은 온기가 부족했다.
엑셀 창을 닫고, 불을 켰다.
동생은 현금 흐름을 계산했지만,
나는 고기가 익는 시간을 계산하고 있었다.
그것이 내가 들여다볼 진짜 숫자였다.
그간, 고생 많았다.
이 말 만큼은 간지럼 알러지약을 먹어서라도
꼭 입 밖으로 내어 소리를 입혀주어야지.
푹푹 삶아지고 있는 고기 앞에서
최최최종 리허설을 해본다.
SSO.
# epilogue.
곧 명절입니다.
각자의 언어로, 각자의 자리에서,
잘 드시고, 잘 쉬시길.
- 전통시장+대형마트 @ 가락동 어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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