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꿀 수 없는 과거에서 벗어나기
모임에서 돌아와서는 필름을 돌리듯 지난 대화를 반추하며 '그때 단호하게 말했어야 했는데', 업무 상 지적을 하는 직장 상사에게 '내가 아니라 당신이 한 일이라고 당당하게 말할걸', 소심한 아이를 보면서 '내가 너무 엄하게 키웠나?'......
자잘한 말과 행동을 후회하는 것은 물론, 갑작스러운 심정지로 돌아가신 아빠에게 전날에도 그 전날에도 전화 한 통 할 생각을 하지 못했던 무심한 나를 불러내 원망하곤 했다. 다른 과거들은 현재와 이어지고 있으니 곱씹을 여지가 있다고 해도, 아빠는 영영 세상을 떠나가 버리고 말았다. 정말 끝나버린 것이다. 어떻게 해볼 여지가 없는 확실한 단절이 가장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 한동안 '그때 내가 곁에 있었더라면 얼마 전 교육을 받은 심폐소생술로 아빠를 살릴 수 있었을 텐데...' CCTV속에서 쓰러진 아빠를 무심코 쳐다보고 그냥 지나가버린 남녀의 자리에 나를 넣어, 발견한 즉시 지체 없이 심폐소생술을 하는 장면을 수없이 상상했다.
현재에 집중하면서 바꿀 수 없는 지난 일에 대한 미련은 버리기로 했지만, 문득 한 번씩 떠오르는 과거에 사로잡히면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바꿀 수 없는 과거 대신 현재에 집중하기로 했으면서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이미 벌어진 일에 상처받았고 회복되었다한들 흉터를 안고 살아가는데, 이 흉터가 그때의 고통을 자꾸 일깨우는 것이다. 모든 경험이 나를 성장시키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경험들은 끔찍한 상흔을 남겨 앞으로 나아가려는 나의 머리채를 잡아 뒤로 이끈다. '그 일은 없었어야 했다.'라고 할 만큼 큰 충격과 고통을 준 과거는 더욱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끊임없이 되살아난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한다는 말인가? 돌아가신 아빠를 살려낼 길은 없다. 아빠는 그렇게 돌아가시면 안 되었다. 나에게 어떤 말을 남기시거나 아니면 내가 전하려 했던 말을 듣고 가셨어야 했다. 이런 이별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아무리 현재에 집중하려고 해도 아빠가 세상을 떠났다는 과거가 텅 빈 현재를 만들어냈으니 도저히 분리할 수 없었다. 다시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한 인식이 흐릿해졌다. 내가 붙잡고자 한 선명한 현재는 내가 놓지 못하고 있는 과거의 크나큰 영향 아래 있었다.
직장에서 부서 간 갈등이 생기고 구성원들이 자기 살겠다고 서로에게 짐을 떠넘기는 상황에서 큰 상처를 받았다. 그리고 그 뒤치다꺼리는 현재진행형이다. 어떻게 지나간 과거에 미련을 버리고 현재에만 오롯이 집중할 수 있다는 말인가. 믿었던 사람에게 뒤통수를 맞고 나니 과거로 돌아가는 생각들을 멈출 수 없었다. 같은 처지인 이들과 수없이 그 순간을 반추하며 '그때 그들은 너무했어. 아무리 자기 사는 게 우선이라 해도 그렇게까지 해야 했나' 당시의 생생한 분노를 공유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한 순간도 헤어 나올 수 없었던 비극을 까맣게 잊었다는 것을. 현실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급급해 슬픔에 취해있을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다시 아빠를 떠올리면 슬프고 눈물이 났다. 하지만 이제는 떠올리지 않으면 떠오르지 않는 순간이 더 많다.
모든 과거가 그렇게 퇴색되고, 굳이 생각하지 않으면 생각이 나지 않는 자리로 이동될 수 있는 것이었다. 어쩌면 나는 그동안 슬픔에 취해 과거에 집착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흘러가게 놓아버리면 자연스럽게 소실될 기억들까지 마치 이 고통이 퇴색되고 잊힐까 봐 시험 전에 반복해 암기를 하듯 잊혀질만하면 불러내곤 했던 것이다. 뒤통수를 친 인간들이 어디서 잘 살고 있건 말건 집착하지 않고 흘려보냈더라면 벌써 그 괴로운 기억에서 벗어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과거는 바꿀 수 없는 일이 아니었다. 과거란 이미 지나가버려서 오로지 내 기억 속에만 있는 것이기에 바꾸기가 더 쉽다.
나를 괴롭히던 과거의 기억들의 자리 배치를 새롭게 하기로 했다. 과거를 재편하는 것이다. 기억할 가치가 있는 과거에 비중을 두어 편집을 한다. 과거를 재창조할 수 있다면 그 영향을 벗어날 수 없다고 믿었던 현재도 재창조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선택한 과거에만 '과거'라는 지위를 주기로 하면서 비로소 떠안고 살아야했던 수많은 지난 상처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잊을 수 없는 것이 아니었다. 잊고싶지 않아서 붙들고 있었을 뿐이다. 이제는 내가 붙잡고싶은 과거에만 기억의 자리를 내어주기로 했다.
마음속에 기억할 가치가 있는 과거를 저장하고 고귀하게 살아가십시오. 하지만 과거의 경험을 수정하고 개선하고자 한다면 가장 먼저 할 일이 '교정'이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과거가 현재에 재창조된다면 교정된 과거 역시 현재로 재창조될 것입니다. - 네빌 고다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