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노래
연극 <슬픔의 노래>의 원작은 정찬의 동명 중편 소설, 제26회 동인문학상 수상작인 <슬픔의 노래>다. 연극하는 사람이라면 이 소설을 무대에 올리고 싶은 이들이 많았으리라. 소설 <슬픔의 노래>는 문장의 서술이 ‘연극적’이라는 평이 많았는데, 소설의 주인공도 연극배우다. 원작이 명문장이라 연극도 좋은 대사가 많다. “배우는 무대를 견뎌야 한다. 견디지 못하는 순간 무대가 배우를 삼켜버린다.” 인생과 예술에 대해 이만 한 비유가 없다.
이 연극은 1995년~1996년 처음 공연되었고 많은 상을 받았다. 20주년을 기념하여 2016년에 원년 멤버인 ‘레전드’ 팀과 ‘뉴 웨이브’ 팀으로 더블 캐스팅해 무대에 다시 올렸다. 나는 두 번 모두 보았다. 두 번째도 원년 멤버인 박지일이 나오는 ‘레전드’ 팀 공연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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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박운형은 ‘80년 광주’에서 군인으로서 가해자였다. 작품은 주인공의 죄의식을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광주의 기억 때문에 배우가 되었다. “칼이 몸속으로 파고들 때 칼날을 통해 생명의 경련이 손 안 가득 들어오지요……. 생명의 모든 에너지가 압축된 움직임…… 한 인간의 생명이 이 작은 손안에 쥐어져 있다는 것이죠……. 그것은 상상할 수 없는 쾌감입니다.” 그는 무대 위에서만은 죄의식의 갑옷을 벗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방황 끝에 배우가 되었다. 즉, 그가 연기를 계속하는 이유는 살인의 쾌락을 계속 즐기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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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세상을 아는 듯 ‘비관적이다’. “강을 건너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지요. 배를 타는 것과 스스로 강이 되는 것. 대부분 작가들은 배를 타더군요. 작고 가볍고 날렵한 상상의 배를.” 나는 이 대사처럼 상상력을 정확하게 정의한 경우를 알지 못한다. 상상력은 상상하는 행위가 아니다. 상상력은 다른 생각이다. 내가 서 있는 자리, 위치를 바꿀 때 새롭게 생성되는 다른 정치적 입장, 공간을 의미한다. 위 대사가 비판하는 상상력이란 현실에 발을 담그지 않은, 현실에 무지한 혹은 현실을 이용하는 이들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행사하는 ‘생각 없음’ 일뿐이다.
스스로 강이 될 것인가, 배를 탈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누가 자기 몸을 강으로 삼겠는가. 스스로 강이 되기를 선택한 사람은 얼마나 외로울 것인가. 아니, 요즘 같은 세상에 강이 된 경우와 배를 탄 경우를 구별이나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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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고 <슬픔의 노래>에 대해 찾아보았다.
소설이면서 연극.
줄거리를 요약한 웹사이트는 많았지만(이대학보, Newsis, art chosun, 예술지식백과 등등) 그중에서 이대 학보에 나온 것이 간단하고 명료했다.
아래는 그 줄거리
언론사에 근무하는 기자이며 공산권의 쇼팽 음악원을 소개하기 위해 폴란드로 출장을 온 유성균이 취재를 도와줄 영화학도인 친구 민영수를 만나고 그를 통해 폴란드에서 유일한 한국 배우인 박운형을 알게 된다.
처음에는 작곡가 구레츠키와의 인터뷰에서 통역을 부탁하는 입장이었는데, 박운형의 모습에서 구레츠키와의 유사성을 느끼게 되고 점점 그의 내면세계에 호기심을 갖게 된다.
이러한 내면의 엿보기는 동일한 입장으로 다가오는데, 그들이 아우슈비츠를 방문한 후 집시가 경영하는 술집에서 폭발하는 박운형의 부르짖음은 광기의 발산이면서 이 극의 정점이다.
출처 : 이대학보(https://inews.ewha.ac.kr)
광주는 그것을 겪은 세대이건 아니면 나중에 들으면서 자란 세대이건 끊임없이 재생산될 것이다.
난 "강"이란 제목으로 끊임없이 시를 써오고 있다.
강을 끊임없이 재생산한다는 얘기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위 대사(234p)에서는 세상에 대해 얘기하면서 세상을 얘기할 때 잘 써먹는 소재인 강을 끌고 나오고 마침내 강을 건너는 방법에 대해 썰을 푼다.
배를 타는 방법과 스스로 강이 되는 법!
최대한 두 가지로 단순화시키면서 독자들의 집중력을 끌어 모으고 있다.
그러나 정희진 작가는 그 대사를 상상력이라고 맞받아치면서 "생각 없음"이라고 꼬집는다.
그러면서 그 두 가지를 구분하는 것조차 요즘에는 의미가 없다고 얘기한다.
여기서 나는 또 이렇게 반문한다. 왜 두 가지뿐이지?
헤엄쳐서 건너는 방법, 잠수복 입고 잠수해서 가는 방법, 기구를 사용해서 날라서 가는 방법, 다리를 놓은 후 건너는 방법 등 아주 많다.
사실 이런 식으로 나열형 대사를 쓰면 이건 죽도 밥도 안된다는 걸 나 스스로도 잘 안다.
그렇다고 해도 강이 되라는 등의 차라리 詩에 적합한 비유는 쓰는 게 아니다.
나라면 "강이 되어서 건너는 방법"이 아니라 "헤엄쳐서 건너는 방법"이라는 구체적인 대조를 쓰겠다.
정희진 작가도 대사 한 줄 가지고 평을 하고 나도 마찬가지다.
작가보다 비평가가 더 먹고살기 편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창작은 창조의 고통으로 몸부림치지만 비평은 잘근잘근 씹을 대상만 찾으며 된다.
푸하하하.
어차피 내 글은 밑줄 그은 문장에 대한 비비꼬기와 씹어대기가 주된 목적이므로 이렇게 질질 끌어봤다.
그나저나 난 이 책을 좋아한다.
그 이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것보다 아래에 복사해서 가져온 머리말을 보면 이 책의 본질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정희진에게 영화는 기분 전환이나 휴식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외로움과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 괴로움 속에서 삶을 살아갈 힘을 얻는 치열한 인식 활동이다. ‘혼자서 영화를 본다’는 것은 영화와 홀로 대면하여 자신만의 눈으로 보고 해석하는 일이며, 나와 대화하고 관계를 맺는 일이다. 영화와 나만 있는 ‘자기만의 세계’로 들어가 영화 속 인물과 만나고 그 인물을 통해 나를 발견하고, 나의 내면과 상처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혼자서 본 영화』는 ‘나에게 말 걸기’이자 ‘타인에게 말 걸기’의 기록이다.
영화를 보는 나만의 습관이 있다. 혼자 본다. 어두운 극장 안에서 메모하느라 대개는 두 번 본다. …… ‘혼자서 본 영화’는 영화와 나만의 대면, 나만의 느낌, 나만의 해석이다. 나만의 해석. 여기에 방점이 찍힌다. 나의 세계에 영화가 들어온 것이다. 지구상 수많은 사람들 중에 같은 몸은 없다. 그러므로 자기 몸(뇌)에 자극을 준 영화에 대한 해석은 모두 다를 것이다. 한 작품을 천만 명이 본다면 그 영화는 천만 개의 영화가 ‘되어야 한다’.
(책 머리말 중에서)
영화를 좋아한다면 그리고 타인의 영화평에 넉넉한 수용성이 있다면 추천하는 책이다.
오늘은 헨리크 구레츠키의 <슬픔의 노래>를 들어봐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