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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제트 Aug 18. 2023

이기주 <한 때 소중했던 것들> 중에서

달달한 책도 가끔 좋다

이기주 <한 때 소중했던 것들> 중에서


그즈음 나는 사소하지만 꽤 중요한 질문을 받았다. 어느 날 식사 자리에서 “전 글쓰기가 두렵고 힘들던데요. 당신은 왜 쓰는지 물어봐도 될까요?”라는 의문문이 내 가슴을 향해 달려들었다. 목구멍을 격하게 치받고 올라오는 대답이 있었는데, 난 그걸 깊숙한 곳에서 건져 올린 다음 천천히 펼쳐놓았다.

“저 역시 글을 쓰는 일이 두렵고 힘들 때가 있어요. 그때마다 반대의 상황을 가정하곤 합니다. 만약 글을 쓰지 않고 살아간다면 어떨까? 아마 전 하루도 못 버틸 겁니다.”

“네? 왜요?”

“음, 제 경우엔 글을 쓸 때 수반되는 고통보다 글을 쓰지 않을 때 생기는 고통이 훨씬 크고 무겁거든요. 언젠가부터 전 큰 고통을 버리고 작은 고통을 취하며 사는 것 같아요. 글 쓰면서 사는 삶을.”

“큰 고통이 아니라 작은 고통이라…….”

“네, 그리고 전 두려움이 무조건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혹시 미국 작가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 읽어보셨나요? 거기 보면 스타벅이라는 일등항해사가 등장하잖아요.”

“스타……. 전 커피 전문점이 떠오르는데요.”

“하하. 맞아요. 관련이 있습니다. 어쨌든 소설 속에서 스타벅은 고래잡이배를 오래 탄 선원이고 비교적 이성적인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이런 말을 해요. ‘나는 고래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를 배에 태우지 않아’라고요.”

“그러니까 스타벅의 말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으면 오히려 탈이 날 수도 있다는 의미인가요?”

“예, 그렇게 볼 수 있죠. 뱃일뿐 아니라 어떤 일이든 약간의 두려움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적당한 두려움’이라고 할까요. 적당히 두려움을 느낄 때 마음에서 무모함과 지나친 낙관주의가 사라지는 것 같아요. 그러면 두려움은 곧 진지함이 되고 진지함은 곧 일의 동력이 될 수 있죠. 반대로 어떤 상황 앞에서 두려움이 깡그리 사라지면, 그러니까 겁을 상실하면 겸손을 잃어버리는 것 같아요. 자신이 잘났다는 착각에 사로잡혀서 실수를 저지르거나 오류에 빠지기도 쉽죠.”

“적당한 두려움이라……. ‘적당함’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단어잖아요. 그게 문제네요.”

“예, 그렇죠. 늘 적당함이 문제죠. 아무튼 전 적당한 두려움이라는 녀석에게서 볼펜을 빌려 글을 쓰고 있는 듯해요. 그래서 전 글쓰기가 두렵지 않은 순간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84 -88 page 적당한 두려움에 관하여 중에서)

밤늦게 소중한 사람을 기다리는 이들이 어둠을 향해 내뿜는 온기가 이 세상을 지탱하고 있는 게 아닐까. 저들은 달에서 빛을 끌어와 사랑하는 사람에게 힘껏 던져주고 있는 게 아닐까.
(202 page 밤마다 서성이는 그림자들 중에서)

앞에서 오는 돌을 맞으면 ‘운명’이고, 뒤에서 오는 돌을 맞으면 ‘숙명’이라는 말이 있다.
산다는 것은 그렇게 예측이 불가능한 것이다.
(265 page 꼭 가야만 하는 길 중에서)

사랑의 생성 과정에서 호칭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움트면 기존의 호칭은 밖으로 밀려나고, 둘의 관계 속으로 새로운 호칭이 유유히 걸어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생겨난 새롭고도 특별한 호칭은 서로의 마음 구석을 환하게 비추고 마음과 마음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 정서적 울타리를 친다고 할까. 호칭이라는 나뭇가지를 엮어 두른 울타리 안에서 서로를 안고 또 그렇게 앓기도 하면서 함께 뛰놀고 노래하다 보면 사랑은 더욱 단단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사라지지 않는 감정은 없는 법이다.
그리고 사랑이 죽는 순간, 대개 호칭도 따라 죽는다.

사랑이 대단원의 막을 내리면 울타리 안에 있던 상대가, 즉 내 이름을 특별하게 불러주던 사람이 홀연히 사라졌음을 깨달으며 상실감에 허우적거린다
(354 page 호칭을 빼앗길 때 중에서)

새로운 것은 그립지가 않다.
그리운 것은 대개 낡은 것들이다.
혹은 이미 오래전에 내 곁을 떠난 것들이거나.
(366 그리운 것의 속성 전문)

살아간다는 것은 어두운 터널 속에서 자기만의 빛을 발견하고 그것을 향해 걸어가는 일인지 모른다. 빛을 발견하려면 빛만 응시해선 안 되지 않나 싶다.

때론 어둠 속을 걸으면서 손끝으로 어둠을 매만져야 한다. 어둠을 가로지를 때 허공으로 흩어지는 어둠의 파편들을 한데 끌어모아, 현미경 들여다보듯 어둠의 성질을 치밀하게 알아내야 한다. 그런 뒤에야 우린 빛으로 향하는 출구를 발견할 수 있다. 어둠을 직시할 때만 우린 빛을 움켜쥘 수 있다
(381 page 어둠을 매만지는 일 중에서)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잊었던 감정과 기억 따위가 우리 안에서 불거져 나온다. 연두색 새싹이 두꺼운 나무의 외피를 뚫고 힘차게 돋아나는 것처럼 말이다. 봄엔 삼라만상의 온갖 것이 그러하다. 안에서 밖으로 새롭게 솟아나고 아래에서 위로 튀어오른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봄이라는 단어에 탄생과 탄력의 의미가 담겨 있는 건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봄을 뜻하는 한자 ‘춘春’은 햇살을 받아내는 나무에서 새순이 움트는 모습이다. 영어 단어 ‘스프링 spring’은 돌 틈에서 맑은 물이 콸콸 솟아나는 옹달샘에서 비롯된 단어다. 이 역시 흥미롭다.
(385 page 부모는 자식대신 울어주는 사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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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역시 전자책으로 다운로드하여서 읽은 책 중 하나

사실 내 취향은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계속 읽게 되면서 그럭저럭(?) 밑줄 친 부분이 있어서 옮겨봤다.

작가에겐 미안하지만 적당히 달달한 그런 것들은 가제트 취향은 아니다.


달달한 문장들을 좋다 나쁘다 평가하는 건 아니다.

그리고 어떠 문장이 달달한가는 지극히 주관적이다. 

때론 달달한 문장들도 인생에 필요하다. 적당한 설탕이 진한 커피에 필요하듯.

그런데 오래도록(30년이 넘었다) 블랙커피만 먹어 온 가제트에게는 달달한 건 체질적으로 안 맞는다.

근데 달달하다면서 왜 읽었고 밑줄까지 그었냐고?

말했잖아, 달달하다고-이러면 나가리인데(무한반복인데를 쓰려다 영화 "신세계"에서 최민식의 대사가 생각나버렸네)

달달한 거 좋아하는 분들에겐 좋은 책일 거니까.


인터넷에서 구한 책 표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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