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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송 Nov 04. 2019

우울할 땐 먹어야 한다, 맛있는 걸

일상의 흔적 99

11월 2일, 훈훈과 쌀쌀을 오가는 일교차. 한번 똥손은 영원한 똥손인가 보다.

SCA 수업 5주 차, 이제 오늘을 제외하면 단 한 번의 수업만 남았다. 레벨 1은 분명 쉽다고 했는데 매주 커피 한잔에도 수많은 노력이 들어간다는 것을 배운다. 우유 스티밍만 벌써 3주째건만 매번 피드백이 날아온다. 우유가 너무 뜨겁거나 미지근했고 거품이 너무 적거나 많았으며, 단단하거나 흐물거렸다.


우울하다. 빵을 사 온 수강생 덕분에 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이 날따라 더 화기애애했지만 우울했다. 다른 분들은 대충 감을 잡아가는 것 같은데 나만 제자리 혹은 뒷걸음치는 것 같아 웃어도 웃는 게 아니었다. 뭐든 경험을 좋아하는 나지만 배움 앞에서 망설이는 것은 이런 점 때문이다. '나만 뒤처지는 것은 아닐까?' 이 작은 생각이 늘 내 발을 붙잡는다.


결국 마지막까지도 제대로 된 카푸치노 한잔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만드는 순간부터 무엇인가 잘못됐음을 짐작하고 제출에 앞서 이미 우울했다. 어째서 더 감을 잃어가는 것일까, 모두가 뿌듯해하는 순간에도 울고 싶은 마음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는 것에 신경을 써야 했다. 자꾸만 축축 처지는 어깨를 부여잡았다. 이제 주말의 시작인데 이렇게 우울할 수 없다.


우울할 땐 뭐다? 먹는 거다. 다행히 오늘 찐빵과 뱌뱌랑 약속을 잡아놨었다. 오늘 이렇게 우울할 줄 알고 약속을 잡은 과거의 나를 칭찬하며 저번 주부터 가고 싶어서 동동 발을 굴렀던 곳에 가기로 했다. 아침보다 쨍쨍한 햇살에 날씨가 더워졌다. 사람이 복작거리를 서면을 벗어나 한적해지는가 싶더니 뿅! 내가 좋아하는 카페가 눈앞에 나타났다.


카페에 손님은 우리밖에 없었다. 저번엔 눈독만 들이고 앉지 못했던 넓은 테이블을 얼른 차지하고 앉아 주문까지 마쳤다. 달달한 수제청의 향과 고소하게 구워지는 찰떡이 코끝을 맴돈다. 역시 다시 기분이 좋아진다. 게다가 귀염뽀짝한 찐빵이와 뱌뱌가 앞에서 신나게 수다를 떨어줘서 더 기분이 좋아진건지도 모른다.


청포도 에이드와 떡와플 made by_손수

잠시 메뉴를 기다리며 찐빵이와 뱌뱌에게 한참을 징징댔다. 내 손은 똥손이라 이렇게 안 되는 것이라고. 만약 연습할 곳만 있다면 얼마를 내든 할 텐데, 요령 없는 똥손이라 슬퍼하는 순간 음료와 와플이 나왔다. 달달하고 청량한 에이드에 쫄깃쫄깃하고 따뜻한 떡와플까지 있으니 세상 행복했다. 이렇게 빠른 기분 전환이라니 단순하다는 것이 때론 좋다.


두툼한 빨대를 힘껏 빨아들이면 달달한 과육과 상큼한 탄산수가 입안을 가득 채운다. 톡톡 터지는 과일을 한껏 느끼면서 쫄깃한 와플을 찢었다. 이곳에서는 와플과 함께 메이플 시럽과 수제 흑임자 크림, 아이스크림을 함께 준다. 어떤 것을 곁들여 먹을지 고민하는 순간부터 행복함이 몰려온다. 달달한 아이스크림, 고소한 흑임자 크림, 행복해지는 메이플 시럽이 우울할 틈을 주지 않는다.


우리가 들어온 후 많은 사람들이 가게를 채우고 다시 비우길 반복했다. 우린 제일 먼저 들어와서 오랫동안 자리를 지켰다. 길게 앉은 김에 메뉴 하나를 더 시켰다. 노랑노랑한 색감으로 자꾸 눈길을 끌던 단호박 빙수! 비주얼부터 우리를 호들갑 떨게 만들더니 너무 맛있었다. 단호박 한 숟갈에 사르르 모든 마음이 녹는다. 내가 언제 우울했냐는 듯 마음이 밝아진다.

단호박 빙수 made by_손수

역시 우울할 땐 마구 먹어줘야 한다. 맛있고 달달한 거 최고! 이렇게 먹고 바로 양식당으로 달려가서 까르보나라부터 홍합찜, 버펄로 윙까지 이것저것 또 주문했다. 씹고 뜯고 맛보고 반복하면서 웃다 보니 광대가 아플 정도였다. 우울한 날 아무 생각 없이 만나 별다른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도 즐겁게 놀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꽤나 행운이 따라야 가능하다.


코노까지 점령하고 마음을 어느정도 비운채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쿨한 우리 엄마는 나에게 단순한 말을 남겼다. "커피 뭐 그까짓 거, 안되면 말고! 되다 안되다 이런 날도 있지. 재밌자고 시작한 거니까 아이코 역시 난 똥손이네 하하하 웃고 넘겨. 시험날은 되게 잘할걸? 아님 말고~"


맞다. 아님 말고. 단순한 일상에 재미를 주려고 시작한 건데 이렇게 스트레스받을 필요가 없다. 인생이 언제나 생각대로 굴러가던가, 내 손이 한 번이라도 내 말을 잘 들어주던가. 취미로 시작했으니 하는 동안 즐겁다면 그 의미와 쓰임을 다하는 거지. 마지막 남은 미련까지도 훌훌 날려버렸다. 역시 우울할 땐 엄마표 쿨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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