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송 Dec 26. 2019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겠어

일상의 흔적 102

12월 26일, 으슬으슬 겨울비. 퇴사 한 달 제주살이 한 달.

베란다 넘어 빗방울 소리가 울린다. 조그마한 베란다가 침대 옆에 바로 붙어 있는 덕에 밖의 날씨가 어떤지는 일어나자마자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포근한 날씨 덕에 이번 겨울엔 아직 제대로 눈을 보지 못했다.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을 뒤로하고 커피 한잔을 들고 거실에 앉았다. 꽤 굵게 내리는 비 사이로 바쁘게 움직이는 차와 사람들이 보인다.


퇴사한 지 한 달 반 남짓, 제주살이를 시작한 지 이제 한 달. 내 일상은 많은 것이 변했다. 알람에 눈을 뜨고 정신없는 와중에 출근 준비를 하고 신경을 곤두세우며 회사일을 쳐내고 퇴근 후엔 친구와 만나거나 혼자만의 시간을 갖던 부산에서의 생활이 아주 먼 일같이 느껴진다. 이곳에 잘 적응했다는 뜻일까, 사실 아직 내 집도 내 방도 내가 이곳에 있다는 현실이 멍하고 아득하다.


이곳에선 모든 것이 느긋하다. 아침엔 근처 공원을 산책하고 천천히 점심을 먹는다. 오후엔 때론 낮잠을 자거나 책을 읽고 엄마와 필요한 것을 사거나 각자의 시간을 보낸다. 사실 오랫동안 살았던 동네지만 많은 것이 변해 있기에 처음 이사 온 사람처럼 동네 탐방을 주로 떠난다. 이렇게 하루하루가 흘렀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많은 시간이 흘렀고 올해를 며칠 남겨두지 않은 지금이 됐다.


제주도는 이런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모든 것이 느리고 편안하게 흘러가는 듯 고요하다. 소소한 일을 하고 나면 어느새 밖은 어둡다. 바쁘게 움직이고 하루하루 아등바등 살던 부산과는 전혀 다른 정적인 공기와 분위기가 있다. 한 달 동안 이런 특유의 분위기에 젖어 살던 중 친구의 카톡을 받았다. 잘 지내고 있는지 묻는 친구의 말에 그저 적응도 잘하고 잘 살고 있다고 말했다.


"내려가면 힘들어할 줄 알았는데 아무렇지 않은가 보네, 다행이다!"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겠어...'라고 썼다가 지웠다. 그저 가벼운 대답만 하고는 대화를 마쳤다. 내가 그동안 살아온 환경, 친한 지인들, 내 일상, 모든 것을 뒤로하고 내려온 제주도다.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이지만 이젠 추억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곳에 다시 돌아왔다.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고요하고 조용한 이곳에서 매일매일 수많은 생각을 지워내려고 애쓰고 있다.


이곳에 내려온 것을 후회하진 않는다. 다만 내가 하던 일과 접점이 있는 회사 계열이 없어 매일 구직사이트를 들어가 한숨만 쉴 때, 친구를 만나 기분전환을 하려고 해도 만날 수 있는 친구가 거의 남지 않았다는 것에, 왠지 모르는 발목을 조여 오는 무기력함에 때론 힘들다. 게다가 혼자 있는 게 익숙하던 나이기에 엄마의 존재가 때론 어색하고 불편하다. 아무렇지 않아 지기 위해 매일매일 노력할 뿐이다.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것은 내 기분을 그대로 표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울한 기분을 내보내고 싶어도 꾹 눌러야 하고 때론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내고 싶지만 그럴 수 없고, 먹기 싫은 끼니도 같이 먹어야 한다. 이렇게 누르고 누른 감정을 배출하고 싶어도 당장은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른다는 것도 내 마음을 답답하게 만든다. 지금까지의 하루하루는 이곳에, 엄마와 생활에 잘 적응하기 위한 나날이었다.


누군가는 제주도를 로망의 섬이라고 부르고, 이주의 꿈을 꾸거나 살아보고 싶어 모든 것을 내려두고 온다지만 그것은 그들의 감정일 뿐이다. 나도 같은 것은 느낄 순 없다. 좋아 보인다는 친구의 말에 사실 이런저런 고민을 풀고 징징거리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이 마음을 누군가에게 표출한다면 부정적인 마음만이 쌓일 것 같아 그대로 삼켜냈다. 제주에서의 생활은 이제 겨우 한 달뿐이고 이외에 좋은 점도 많다.


내가 내려오고 마음이 편해졌다는 엄마의 말에, 지인들에게 나를 소개하며 환하게 웃는 엄마의 얼굴에, 혼자 보내야 하는 밤이 무서워 불을 끄지 못했던 엄마의 방에 불을 꺼주며, 이런저런 고민을 두런두런 나누다 꼭 안아주는 엄마의 품에 몇 번이고 내려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 언젠가 제주생활에 너무 익숙해지고 제주의 분위기에 젖어들 때가 올 것이다.


제주에서의 하루하루가 아무렇지 않은 어느 날이 될 그때가 올 것이다. 그때 이 글을 다시 읽는다면 아마 그땐 그랬지 하고 웃을 수 있지 않을까.

작가의 이전글 '평범'하다는 것은 계란 같은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