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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송 Nov 18. 2019

'평범'하다는 것은 계란 같은 것이다

일상의 흔적 101

11월 15일, 매서운 서울 추위. 어릴 땐 평범한 것이 싫었다.

퇴사를 앞두고 마지막 출장을 떠났다. 이젠 회사 출장으로는 올 일 없는 부산역을 바라보니 기분이 묘했다. 조금은 쌀쌀한 아침 공기에 따뜻한 커피 한잔을 손에 들고 기차 안에 몸을 실었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풍경을 비추던 창문이 어두워지면서 얼굴을 비춘다. 저 표정은 아쉬움일까, 그저 생각이 없는 걸까, 어디서든 볼 수 있는 평범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서울에 가까워질수록 발끝부터 차가운 기운이 감돈다. 바닥을 살짝 적시던 비는 어느새 폭우로 바뀌어 세찬 바람을 만들어 냈다. 부랴부랴 우산을 사들고 인터뷰 장소로 이동했다. 비 오는 서울 거리는 느낌이 또 새롭다. 마지막 출장, 마지막 인터뷰, 마지막이란 단어에 묘한 느낌이 서린다. 다행히 이번 인터뷰도 유쾌하고 즐거웠다. 담당자와 아쉬운 인사를 나누고는 사촌언니 가게로 향했다.


언니와 반가운 인사를 나누자마자 음식이 줄줄이 나온다. 다 먹지도 못한다고 툴툴거리는 내 입을 꼬집으며 언닌 연신 그릇을 만지작 거린다. 공기가 차가워서 식을까 봐 전전긍긍인 언니 표정에 호들갑을 크게 떨며 먹기 시작했다. 다른 음식을 더 내오려는 언니를 말리며 얼른 그릇을 치워버렸다. 언니는 늘 나를 오랜만에 만난 손주 대하듯 군다.


기차 시간을 여유롭게 예약한 덕에 언니와 긴 대화를 나눴다. 사촌들 중에서 언니와 나는 어릴 때부터 유독 잘 맞았다. 띠동갑도 넘는 막내 동생에게 언닌 늘 맞춰주었고 취향이 비슷한 덕에 얘기만 하면 끊임이 없었다. 참새처럼 재잘거리던 나는 언니에게 삶이 너무 평범해서 심심하다는 얘기를 했다. 특별할 것 없는 하루가 고맙기도 하지만 때론 지루했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언닌 평범한 인생이야말로 제일 특별한 거라고 말했다. 크게 좋은 일도 아주 나쁜 일도 없는 평탄한 삶이야말로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세세하게 인생을 들여다보면 정말 평범하기만 한 삶은 없다고 했다. 모든 삶에는 저마다의 굴곡이 있는데 그 굴곡마다 큰 좌절 없이 잘 지나쳐 왔다면 그것만큼 특별한 것이 없다고.


생각해보니 언니 말이 맞았다. 어릴 땐 무엇인가 특별하고 싶었다. 평범하다는 것은 어쩐지 지루하고 고루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별 탈 없이, 특별한 사건 없이 지금까지 왔다는 건 행운 그 이상의 축복 같은 것이었다. 누군가에겐 내 평범한 (혹은 조금 심심한) 삶이 간절하게 원하는 인생의 모습일 수도 있다.


언닌 평범한 것은 계란과 같다고 말했다. 구하기도 쉽고 요리하기도 쉬워 늘 주위에 있고, 흔하다고 생각하지만 없으면 아쉬운, 때론 요리의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계란. 그러나 흔한 계란조차 쉽게 가질 수 없는 삶도 있다. '평범'은 늘 주위를 맴돌기에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누군가에겐 작은 평범의 조각조차 간절하게 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언닌 내 머리를 가볍게 토닥였다.

"평범한 하루하루가 지루하고 심심할 때가 있지. 왜 내 인생엔 특별한 순간이 없을까, 왜 다른 사람처럼 반짝이는 무엇이 없을까. 하지만 잘 생각해봐. 평범하게 흘러간 하루하루는 네가 열심히 그 시간을 보냈다는 증거일 거야. 누구보다 충실한 하루를 보냈으니 큰 사고 없이 고요하게 흘러갈 수 있는 거지."


생각해보면 나도 그저 평범한 것은 아니다. 엄마가 준 성도 특별했고, 엄마의 직업도 평범하진 않았다. 대학생부터 지금의 직업까지 내 삶도 많은 것이 변해왔다. 여기서 더 특별하길 바라는 것은 욕심이라고 생각했다. 평탄하고 별일 없는 하루를 보내기까지 수많은 시간 속 내 노력이 들어있다고 생각하니 모든 순간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역시 나이 먹는 것과 철이 드는 것은 다른가 보다. 난 늘 스스로 다 큰 어른이라고 생각했는데 언니 앞에 서니 다시 철딱서니로 돌아간 것 같다. 돌아가기 전 언니 품에 쏙 안겨 어깨를 토닥였다. 사랑하는 우리 언니, 언니보다 키는 더 커졌지만 여전히 언니 앞에서는 꼬맹이가 된다. 내 엉덩이를 토닥이던 언니가 슬쩍 귓속말을 했다.


"닭날개 좀 튀겨서 싸줄까?"

"내 위를 터지게 할 생각이라면 이미 성공이야. 언니 이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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