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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송 Jan 27. 2020

제주 도민으로 산다는 건

일상의 흔적 104

1월 7일, 봄처럼 따뜻한 겨울. 때론 꿈같은 때론 현실 같은 것.

제주살이 한 달이 넘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이곳이 어색하다. 벽지 말고는 이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오래된 집이나 어릴 적 추억이 고스란히 묻은 동네가 익숙하긴 해도 여기 생활은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부산에 살면서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작은 일부터 여러 가지 상황에서 당황하고 때론 한숨과 포기를 생각하고는 한다.


이곳엔 나만의 아지트가 되어줄 카페도 없고, 입맛 없을 때 시켜먹던 맛집도 없고, 답답하면 훅 하고 떠나고 싶어도 결국 제주도에서 벗어날 수도 없고, 조용한 북카페를 가려고 해도 시내권에는 없고, 몇 시간이고 놀다 오고 싶은데 그럴 서점도 없고, 다른 사람 눈치 볼 거 없이 소리를 내지르던 코인 노래방은 너무나 멀고. 혼자든 여럿이든 여기저기 놀러 다니기 좋아하는 나에겐 너무나 답답했다.


제주도는 아무래도 개인 차량이 없이는 조금 힘들게 다녀야 하는 곳이기에 운전을 다시 배우고 싶지만 교통사고를 당했던 그 순간의 트라우마를 아직 이겨내지 못해 어렵기만 하다. 게다가 생각보다 이직이 쉽지 않다. 괜찮아 보여 이력서를 넣어보려고 하면 위치가 항상 애매하다. 버스로 한 시간이 넘게 걸리거나 차 없으면 갈 수 없는 곳에 위치해 있어 내용을 보기도 전에 위치를 먼저 확인해야 한다.


한 달이 넘어가는 시간 동안 이런저런 이유로 제주도 생활이 조금은 지치고 답답했지만, 그렇다고 나쁜 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 기다리는 집이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따뜻하다. 아플 때 역시 아프다고 징징거릴 수 있는 상대방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위로가 되고 안심이 되는지 모른다. 매일 혼자 보던 장을 같이 보면서 마주 앉아 밥을 먹으며 식구의 의미를 다시금 새겨본다.


날씨가 좋은 날엔 엄마와 종종 드라이브를 떠나는 것도 좋다. 이제 혼자 훌쩍 나가서 돌아보고 오는 건 엄마가 서운해해서 힘들겠지만 혼자보단 둘이 좋다는 걸 알기에 아쉽지 않다. 새파란 바다를 끼고 천천히 돌다 맛있는 것도 먹고 돌아오는 길에 일몰까지 보는 날은 행운처럼 다가온다. 다른 곳에서도 일몰을 본 적은 많지만 깨끗한 제주의 하늘에서 바라볼 땐 몽글몽글한 감정이 솟는다.

애월의 어느 밥집에서 바라본 하늘


제주도의 생활은 단짠단짠이다. 저렴한 물건에 붙은 높은 배송비와 오지 않는 택배에 화가 나다가도 도톰한 갈치 한입에 기분이 좋아지고, 도통 올 생각 없어 보이는 버스를 덜덜 떨며 기다리다가도 눈앞에 푸른 바다가 펼쳐지면 모든 걱정을 털고 기분이 좋아진다. 인스타를 찾고 찾은 맛집이 맛없어 부들부들하다가도 작은 구옥을 개조한 카페에서 맛있는 라테 한잔에 몸이 녹는다.


하나씩 하나씩 좋은 점을 찾아가고 있다. 아직은 답답하고 화가 나는 일들이 생기지만 조금 더 시간이 흐른다면 이때 징징거렸던 일들을 웃으며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돌고 돌아 다시 제주도 주소가 찍힌 주민등록증을 꺼내봤다. 앞면도 뒷면도 제주도민이라는 것을 인증하고 있는 작은 사각형의 주소가 이젠 더 이상 바뀔 일은 없을 것이다. 조금은 아쉽고 조금은 후련한, 이곳이 내 평생의 둥지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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