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흔적 126
1월 11일, 녹은 눈 위에 다시 눈. 오래된 포장마차에서는 사장님의 손맛이 그리움을 안고 풍겨온다.
집 내부 공사는 여전히 진행 중, 이젠 부엌까지 뜯어버린 참이라 어쩔 수 없이 저녁을 먹으러 엄마와 나갔다. 새로운 메뉴를 찾아 집 주변을 천천히 걸었다. 우리 집이 위치한 동네는 정말 오래된 작은 주택촌이다. 20년이나 된 우리 아파트도 이 동네에 처음 생긴 아파트로, 처음 입주할 때는 위풍당당하게 가장 높이 올라간 건물이었다. 이젠 오랜 세월을 품고 수많은 사람들의 흔적이 새겨진 오래된 아파트일 뿐이다.
길치에 방향치라 아는 길도 돌아 돌아가는 나지만, 우리 집 주변 골목은 눈감고도 돌아다닐 수 있는 몇 안 되는 길이다. 어릴 때는 동네 친구들과 골목을 뛰어다니고 쌍쌍바를 사서 나눠먹던 골목이라 여전히 이곳에는 즐거움과 그리움이 담겨있다. 주택가라서 빼곡하게 서있는 차들도, 옆집 저녁 메뉴까지 금방 알 수 있을 만큼 가깝게 지어진 주택들도, 나에겐 그리운 추억 속 다정함이다.
조금 더 멀리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주황색 반짝이는 포장마차가 눈에 띄었다. 이런 주택가에 소담하게 자리 잡고 하얀 김을 피우는 포장마차라니, 물을 것도 없이 홀린 듯 걸음을 옮겼다. 저곳에서 어떤 메뉴를 팔던 오늘은 무조건 이곳에서 저녁을 먹어야지. 살짝 비닐을 걷어내며 들어가니 나이가 있으신 사장님이 우릴 반갑게 맞아줬다. 온통 고소한 냄새로 가득한 이곳에서 먹을 오늘 저녁 메뉴는 메밀전병과 감자전, 막걸리!
사박사박 내리는 눈과 함께 먹을 저녁으로 이보다 더 좋은 메뉴가 있을까. 고민 따윈 하지 않았다. 전병 2개 감자전 1개 막걸리 한통! 할머니 사장님이 손수 만든 막걸리라고 하니 도저히 안 시킬 수 없었다. 우리가 첫 손님이라며 말갛게 웃는 사장님의 얼굴이 포근하다. 배고프다며 김치에 단무지를 집어먹는 나를 보더니 사장님 손이 더 빨라졌다. 배고프다고 반찬만 너무 먹으면 안 된다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연신 감자전을 꾹꾹 눌렀다.
바쁜 손놀림으로 내어주신 따뜻한 감자전은 정말 맛있었다. 입맛에 맞게 구워진 바삭한 식감에 순수하게 감자만 사용한다는 말처럼 담백했다. 엄마와 말도 없이 감자전을 먹고 있을 때 체한다며 깔끔하게 우린 멸치 국물을 주셨다. 간단하게 요기하려고 먹은 국수에서 남은 육수라며 쫑쫑 파도 넣어주시고 계란지단도 얹어주셨다. 매일 아침 팔 양만큼만 장을 보고 직접 모든 재료를 다듬어 온다는 사장님의 목소리에서 자부심이 느껴졌다.
타닥타닥 쉬지 않고 재료를 손질하는 사장님의 손길이 바빴다. 빠르게 비워지는 감자전 접시를 바라보시더니 반 이상 먹었을 때쯤 메밀전병을 만들기 시작하셨다. 따뜻할 때 먹어야 맛있다며 우리 감자전 접시가 비워지기만을 기다려주셨다. 감자전 접시를 자꾸 보시길래 우리가 뭘 잘못하고 있나 싶었는데 타이밍을 기다린 거였다니. 다정하신 사장님, 눈 때문에 차가웠던 코끝에서 온기를 맡았다.
생각보다 크고 양이 많았던 감자전을 다 먹고 나니 이제 여유가 생겨 포장마차를 한번 둘러봤다. 작은 주방 옆에 둘러진 긴 테이블은 겨우 5명 남짓 앉을 수 있을 만큼 작았고, 요리하는 공간도 작은 몸집의 사장님이 두 걸음이면 곳곳에 손을 뻗을 수 있었다. 물끄러미 사장님의 바쁜 움직임을 바라봤다. 문득 사장님 손가락이 약간 곱아있다는 게 보였다.
우리에게 접시를 건네거나 막걸리를 전할 때는 움켜쥐고 있느라 그런 줄 알았는데 아무리 봐도 손가락이 곧게 펴지지 않았다. 무례한 시선을 혹시나 사장님이 알아차릴 것 같아 시선을 두지 않으려고 했다.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여전히 손님은 우리뿐이었다. 코로나 19의 여파로 최근 들어 몇 달간은 계속 이런 식으로 손님이 줄었다고 한다. 오늘은 장사를 하자마자 손님이 들어와 줘서 마음도 든든하고 고맙다고 했다.
그렇게 두런두런 서로 말꼬리를 잡으며 대화를 이어가던 중 사장님이 뜬금없이 내게 손이 예쁘다는 칭찬을 했다. 별거 없는 그냥 손이라 머쓱해하던 중 사장님이 본인의 손을 슬그머니 맞잡더니 앞치마 주머니로 숨겼다. 살짝 본 사장님의 손은 그동안 열심히 살아온 흔적으로 빼곡했다. 굵어진 마디에 여기저기 기름에 덴 자국, 나이만큼 자리 잡은 주름과 이것저것 잡느라 두툼해진 손.
손이 못났다며 수줍게 웃는 사장님 얼굴이 고왔다. 같이 따라서 웃고 싶은 맑은 얼굴에 해맑은 미소여서 곱다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사장님은 연신 곱고 예쁘다며 쿵짝쿵짝 주접을 떠는 우리 모녀를 쑥스럽게 바라보다 본인의 손을 보여주셨다.
"손이 못생겼죠? 아무래도 오래 칼질하고 접시나 술병도 움켜쥐고 추운 날도 더운 날도 일하다 보니까 손이 굳어서 이젠 쭉 안 펴지더라고요. 아까 아가씨 손 보니까 너무 예쁘더라고, 나도 아가씨 나이일 때는 그렇게 고왔어요. 살다 보니 내 손가락이 이렇게 굳어지는지도 모르고 내 가족들 배부르게 해 줄 생각만 하고 살았네요."
괜히 찡한 기분이 들었다. 본인의 손을 쓸어보며 다시 해맑게 웃어 보이는 사장님을 따라 웃기가 어쩐지 어려웠다. 나와 내 가족이 따뜻하고 배부르게 살았으니 손가락쯤 굳어도 행복한 인생이라고 말하는 사장님의 말이 귀에 남았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엄마의 손을 꼭 잡았다. 어느새 굵어진 마디와 조금은 거친듯한 손끝이 느껴졌다.
자식은 부모의 청춘을 먹고 자란다는 글을 읽은 적 있다. 그날 봤던 글이 오늘만큼 선명하게 떠오른 적이 없었다. 어느새 나이가 들고 모르는 것이 많아진 우리 엄마, 언제나 나에겐 산처럼 바다처럼 든든한 존재일 줄 알았는데. 꿋꿋하고 열심히 살아온 날만큼 내가 든든하게 남은 날도 지켜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가에 하얗게 쌓인 눈이 꼭 포장마차 사장님과 엄마의 지나온 세월이 내려앉은 흰머리 같아 마음이 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