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흔적 42
4월 14일, 타닥타닥 빗소리. 정 언니가 집에 놀러 왔다.
어쩐지 새벽부터 비 냄새가 났다. 타닥타닥 창문을 두들기는 빗소리를 들으며 봄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비 오는 봄, 포근한 이불에 몸을 묻고 창밖에 소리에 귀 기울여 본다. 이런 느긋한 주말의 아침은 바쁜 평일의 나에게 건네는 소소한 행복이다. 별 것 아닌 작은 빗소리에 행복한 아침이다.
언젠가부터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니고서는 일요일엔 약속을 잡지 않는다. 월요일이 다가오기 전 나를 위한 날을 하루쯤은 꼭 만들곤 한다. 좀 더 어렸을 땐 주말 내내 집에 있는 것이 답답하고 온 에너지를 방출하고 귀가해야 개운했는데 이젠 나만의 시간을 즐기는 어른이 됐다.
조촐한 점심을 먹고 다시 이불속에 몸을 묻었다. 그렇게 슬쩍 잠이 오려는 찰나에 정 언니한테 연락이 왔다. 곧 우리 집을 지날 예정이니 어서 먹고 싶은 음식을 시켜놓으라며 뭐든 쏜다는 말을 쿨하게 던졌다. 우리가 사랑하는 치킨을 가운데 두고 오랜만에 마주 앉았다. 그날의 그날처럼 여전하다는 느낌 그대로 익숙한 분위기가 감돈다. 우린 늘 이렇다는 게 평안으로 다가온다.
언니와는 아무리 오랜만에 만나도 늘 별 것 아닌 일상을 나누게 된다. 서로의 상황이 아무리 달라지고 알 수 없는 분야에 있다고 해도 일상을 털어놓고 공감을 보낸다. 그래서일까, 몇 달 만에 봐도 어제 만난 사람처럼 스스럼없이 어제와 오늘의 이야기를 나눴다. 친언니가 없어서 잘 모르지만 만약 호적 메이트가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작은 투덜거림도 거리낌 없이 드러내고 언니가 토닥여주면 헤헤 웃고 만다.
우린 만나면 결국 옛날 얘기를 하게 된다. 내 인생의 10/1에 불과한 짧은 순간이었는데 강렬한 그 시기의 기억은 늘 과거로 돌아가게 만든다. 생각해보면 과거의 내가 그리운 것은 대체로 사람 때문이다. 늘 다정하게 대해 주던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시간을 보냈던 그때가 그리운 건, 많은 것들이 변화한 지금의 관계 때문이 아닐까.
매일매일이 어제와 같을 순 없다. 수없이 바뀌는 오늘처럼 모두가 변화하고 사람과의 관계도 늘 변한다. 흘러가는 상황에 따라 모든 관계 역시 바뀐다. 늘 어제와 같기를 그날의 우리와 같기를 바랄 순 없지만 때론 입안이 쓰다. 나 역시 변했는데 상대방이 그 자리 그곳에서 기다려주기를 바라는 것만큼 이기적인 것도 없건만, 이기적인 생각이 든다.
사람과의 관계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씁쓸하다. 변해가는 내 주위 상황처럼 변해가는 것일 뿐 본질은 그대로라는 걸 머리는 알지만 서운한 감정까지 해결되진 않는다. 그때와 같지 않지만 여전히 좋은 사람들이 내 곁에 있다. 그것에 감사해야 한다는 생각을 매일한다.
오늘도 울컥울컥 올라오는 이기적인 나에게 말한다.
어떤 형태든 변해가는 상황에도 여전히 내곁을 지켜주는 모든 이에게 감사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