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흔적 44
4월 21일, 살짝 도톰한 니트로도 충분한 날씨. '괜찮다'라는 말에 나를 억지로 가두고 있었다.
이번 달 내내 몸이 좋지 않았다. 월초에 걸린 독감은 약을 오랫동안 먹어도 쉽게 낫지 않았다. 병원을 수없이 다녔고, 때론 사무실에 커다랗게 울리는 내 기침소리가 신경 쓰여 옥상까지 올라가기도 했다. 눈치를 보며 오전에 쫓기듯 병원을 다녀오고 약봉지를 털어 넣어도 몸 어딘가에 남은 독감 기운이 아직도 내 컨디션을 괴롭혔다.
어떤 날은 눈앞이 어지러워 모니터조차 똑바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써야 할 원고는 많았고 찾아야 할 자료도 넘치게 쌓였었다. 무너질 것 같은 몸을 바로 세우고 또 세우며 원고와 씨름하고 원하는 문구를 찾아 키보드를 두드리고 또 두드렸다. 지쳐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쉬고 싶다는 생각도 간절했지만 다들 힘들고 바쁘기에 힘들다는 표현도 차마 하지 못했었다.
만나자는 말을 미루고 미루다 만난 호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어디 아프냐고 물어봤다. 주말이라 푹 자고 잘 쉬었지만 쌓인 피로가 얼굴에 보이나 보다. 무의식적으로 혹은 반사적으로 '괜찮아'라고 했다. 나가기 귀찮다는 느낌을 풍기는 나를 위해 집 쪽까지 올라와준 호한테 고마워 최선을 다해 이야기도 나누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한 시간 두 시간 달달한 커피와 케이크를 앞에 두고 이야기를 나눴다. 티를 내려고 하진 않았지만 계속 얼굴이 좋지 않았는지 호는 몇 번이나 컨디션이 좋지 않냐고 물었다. 씩씩하게 웃으며 괜찮다고 말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서러운 감정이 순식간에 얼굴을 물들였다.
"나 안 괜찮아. 힘들어 아파 쉬고 싶어.
괜찮다는 말 거짓말이야, 너랑 얘기하고는 싶었지만
사실은 쉬고 싶었어. 그래도 너랑 만나서 좋아 진짜 진짜."
괜찮지 않다는 말 한마디가 참 어려웠다. 늘 괜찮다는 말을 수없이 하며 그 틀 안에 나를 억지로 가뒀다. 난 괜찮아, 아무렇지 않아, 힘들지 않아 그러니 난 버틸 수 있어 괜찮아. 늘 괜찮아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다. 힘들다고 기대고 싶지 않았다. 이까짓 이 작은 순간도 힘들다고 말하면 무너질 것만 같아 입 밖으로 내보낼 수 없었다.
'괜찮지 않아'
짧은 문장이 주는 위로가 꽤나 힘이 됐다. 서러운 푸념을 흘려보내고 나니 머리가 가벼운 느낌이 들었다. 떼를 쓰는 것 같은 저 작은 한마디가 오늘을 살아가고 내일을 준비할 힘이 되었다. 오늘만큼은 꼭꼭 숨겨두었던 약한 마음을 꺼내본다. 내일이면 다시 꼭꼭 숨겨두겠지만 오늘은 마음껏 티 내 본다.
(몸도 마음도 무거운 날이면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 달콤하고 사르르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을 손에 쥐고 먹다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게다가 금방 녹는 아이스크림의 형태를 유지하려 집중하면 어느새 잡생각도 사라진다. 주로 스트레스를 받으면 목 위로 열이 쌓이는 타입이기 때문에 더 차가운 아이스크림 생각이 간절한지도 모르겠다. 부드러운 콘 아이스크림도 좋지만 때론 이불을 뒤집어쓰고 영화를 틀어 놓은 채 우걱우걱 퍼먹는 통 아이스크림도 좋다. 차갑고 달달한 아이스크림 한 스푼에 눌러놓았던 서러움도 흘려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