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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라봄 Aug 31. 2023

12주 차 글쓰기 수업

세상에는 글 잘 쓰는 사람이 너무 많다

글을 잘 써서 작가가 된 게 아니다. 나의 작가 데뷔는 정말 호기로움이 반이었다. 출판사 관계자과 독자들껜 죄송하지만 ‘과연 내 글이 책이 될 수 있을까?’ 확신이 없었다.

출판사 관계자와 두 번째 미팅을 가질 때도 나는 이렇게 물었다.

“저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요, 왜 제 원고를 선택하셨어요?”

이제 생각하니 내가 출판사 관계자라면 이 저자 뭐지? 싶었을 거다. 나 역시도 계약서에 도장을 꽝 찍었으니 이런 말을 바보같이 물었는지도 모르겠다. 쓴 글을 고치고 다듬으면서 (그땐 퇴고가 뭔지도 모르고) 끊임없이 물었다.

‘송지현, 너 대체 왜 책을 내려고 하니?’라고.

글쓰기 스승님께서 ‘내 삶을 글에 담아 세상을 이롭게 한다. 독자 한 분이라도 희망과 용기를 준다’는 말이 와닿지 않았다. 아직 내 보지 않았기에 느낄 수 없는 건 당연한 거였다.

내 부족함을 다 아는데 여기에서 무엇을 독자들이 배운단 말인가. 자존감은 책 출간 후 굴삭기로 땅을 파듯 아래로만 향했다. 뚜뚜뚜뚜! 지인들이 본다고 하면 손사래를 치며 “보지 마, 보지 마.”를 외쳤다.


나는 작가가 되면 안 됐었다. 대단하다와 자랑스럽다는 그 한마디를 듣기 위해 책을 쓴 건가. 자괴감이 들었다. 엄마들에게 도움이 되었다면 과연 어떤 도움이 되었을까.

모두 욕심이었다. 잘 팔리고 싶은 욕심. 베스트셀러 빨간딱지가 네이버에 한 번이라도 붙여지고 싶은 욕심.  엄마로 사는 시간에 의미를 발견하면 좋겠다 내 말에 엄마여서 좋았다는 후기라도 받고 싶은 욕심.


저자 강연회를 잘 마친 날은 내가 미치도록 멋지고 괜찮은 사람이었다. 아는 분이 한 모임에서 내 책을 공동구매 하셨다고 다섯 권을 들고 사인받으러 온 적이 있었다. 정말 감사했다. 모임에 초대되어 엄마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면 좋겠다 싶었지만 없었다. 나 역시도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당당하지 못했다. 책을 사 준 지인들에게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 카톡에서 생일이라는 알림을 보면 기프콘을 선물했다. 나는 왜 그게 미안했을까. 내 시간을 썼고 진심을 담았는데 그게 미안한 일은 아닌 거 같은데 어딘지 모르게 미안다.


더 좋은 글이 아니어서 미안했다.

도움이 되었을지 미안했다.

나를 위해 돈을 들여 책을 사주는 게 신랑 말대로 돈 낭비가 될까 봐 미안했다.

행여나 내가 누군가와의 일화를 썼을 때 그 이야기가 상대의 입장에서 오해할까 봐 미안했다.

(실제로 서운했다는 친구도 있었으니까.)


나는 이런 반응에 아직 태연하지 못하다. 내가 아주 많이 부족한 사람인 것만 같다. 아마 솔직한 반응을 들었다면 지금 글을 쓰고 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몇몇 사람들은 내가 작아져 갈 때 힘을 주었다. “그래도 넌 시작했잖아. 글을 완성했고 책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잖아.” 나를 다독여 주었다.




 격려를 받고 좀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글쓰기 수업에 들어갔다. 한때 알고 지낸 작가님이 수업의 진행자가 되셨다. 독서 모임하는 분들과 함께 수업을 신청했다. 글쓰기 수업은 처음인지라 이렇게 내 글을 발표해야 하는지 몰랐다. 내가 얼마 전 책을 냈다는 사실을 참여하는 분들이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의식하는 글쓰기를 해야 했다. 사람들이 ‘작가는 글을 얼마나 잘 쓰는지’ 귀를 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타인의 글에 집중하지도 못했다. 그저 자신이 쓴 글을 읽으면 나오는 감탄사와 박수 소리만 들렸다. 글을 못 쓴다고 온갖 엄살 다 부리면서(그것도 애교 넘치게) 정작 글을 발표하면 너무 잘 써 작가님과 참여자들의 칭찬을 받는 사람이 부러웠다. 나는 못 쓴다고 어리광을 부릴 수도 부끄러워할 수도 없는 처지가 되었다. 책을 냈다는 사실이 늘 어깨에 바위 두 개를 올려둔 것 같았으니까. 타인의 글 속에는 자기만의 결이 담겨있었다. 자신의 상황을 비관적으로 비유하는데 그것이 오히려 설득력 있고 매력적으로 다가다. 아름다운 풍경을 묘사하는 글 속에 나는 들어가 있는 듯했다. 고급스러운 어휘와 단어 선택, 거기다 가끔씩 유쾌하기까지 한 글이 있다.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묘사함으로써 저 사람의 깊이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집에 돌아가 김원봉 님이 누구인지 찾아보고 싶게 만드는 글 있다. 이야기 안에는 슬픔이 담겨있지만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글도 들려주었다. 다양한 글을 듣고  느끼기 잠시, 그들의 평가에 나는 늘 초점을 두었다. “크~”하는 감탄사와 글을 모아 책을 내면 좋겠다는 말은 나를 작아지게 만들었다. 나를 작아지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모든 것은 내 생각에서 나온다지만 그때의 나는 그랬다.


가을에 시작한 수업 겨울의 초입에서 그 끝을 앞두고 있었다. 마무리하는 의미로 작가님은 글 한 편 멋지게 완성하여 문집을 만들자고 제안하셨다. 수강생들은 기한 내에 작가님께 글을 전송했다. 나 글을 보낼 수 없었다. 지하 땅끝까지 내려간 내 글을 누구에게도 공개하고 싶지 않았다. 문집은 누군가에 의해 다시 읽히고 영원히 남게 된다. 그 안에 끼지 않기를 택했다. 수업 중간중간 빠지기도 했다. 암묵적 결석을 하던 어느 날 한없이 작아지는 나를 일으켜 줘야 할 것 같았다. 내가 나를 일으키고, 같이 참여한 독서모임 선생님도 내 마음을 읽고 일으켜 주었다. 그래서 마지막 수업은 참여할 수 있었다. 마지막 수업에서 수강생들의 글이 담긴 문집을 받게 되었다. 문집의 뒷장에 작가님은  <지금 여기>라는 제목으로 거침없이 쓰기를 시키셨다.     


지금 여기,  온샘 도서관에 있다. 오늘 수업에 오기까지 글쓰기 수업에 매주 참여하기까지 늘 고민이었다. 나에게 찾아든 감정과 고민 들이 시간이 지나고 나니 내 마음을 발견하고 조금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더 좋은 글을 쓰고 싶은 욕심,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 이런 마음들마저 내가 다독여 주지 않고 누군가에게 또 위로와 격려를 바라고 있지 않았는지... 오늘 선생님들의 문집에 담긴 글을 읽어보며 ‘나도 보낼걸...’ 후회가 잠시 밀렸다.  오늘 우연히 어떤 분이 써준 편지 글처럼 나는 성장의 계단을 하나하나 오르고 있다. 지금 여기가 있기에 밟아 갈 수 있는 소중한 시간 들이다. 한 계단씩 오르는  그리고 여기 함께하신 분들의 지금을 응원한다.     


세상에는 글 잘 쓰는 사람이 많다. 언젠가 나도 글을 잘 쓰겠지. 막연한 희망은 버리기로 한다. 남들에게 잘 쓴다고 칭송받는 글도 좋지만 나만이 쓸 수 있는 글을 써야겠다. 그저 나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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