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미토닥 Oct 11. 2024

5개월 그녀와 90살 할머니는 천생연분

나이 들면 애가 된다는 옛 말이 맞다는 나의 할머니에게 이 글을 바칩니다


오늘은 날씨가 좋아 5개월 그녀와 돗자리를 챙겨 공원으로 나가본다.

돗자리에 그녀를 눕히고 손가락 놀이를 하고 있는데

나이 지긋한 아들 둘과 휠체어에 타신 할머니가 옆에 자리를 잡으신다.

누가 봐도 아들인 것은 확실했다.

아들 둘과 할머니의 얼굴이 너무나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말을 못 하는 5개월 그녀와 놀고 있는 우리에게

미소를 보내던 할머니는 휠체어에 앉으셔서 노래를 부르셨다.

그 모습을 아들은 영상으로 촬영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을 기록하고 싶어 하는 아들 한 명과

옆에서 할머니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아들 한 명.

이보다 더 가을의 청명한 모습과 잘 어울리는 가족의 모습이 있을까 싶었다.


제법 쌀쌀한 날씨에 할머니는 오래 옆에 있지는 못하셨다.

   

다시 아들들과 갈 채비를 하던 할머니가 지그시 5개월 그녀를 보시더니


"나랑 똑같네."

"네?"

"누가 먹여줘야 먹고

혼자 똥오줌 못 가리고

혼자서는 누워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너처럼 옆에 누가 있어야만 하루하루 살 수 있네.

너나 나나 혼자서는 못 사네."


생각해 보면 왕할머니(나의 할머니, 5개월 그녀의 증조할머니)도

5개월 그녀와 영상통화를 하시며 같은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었다.


"얘나 나나 다를 게 없다.

누가 안 도와주면 꼼짝도 못 하고

자꾸 애처럼 자식한테 떼쓰게 되고

나이 들면 애가 된다더니

그 말이 딱 맞네."


이제 거동이 불편해지신 나의 할머니와 5개월 그녀는 아직 만나지 못했다.

장거리 이동을 아직 해볼 엄두가 나지 않아서 '곧 언젠가'로 만남이 미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영상통화로 서로의 존재를 짧게나마 확인하고 있는 중이다.

90년 왕할머니와 5개월 그녀는 그렇게 영상으로 만나고 있다.


90년 왕할머니는 5개월 그녀가 유일한 낙이라고 하신다.

처음에는 나도 고군분투 육아에 영상통화할 짬이 안 난다는 이유로

귀찮아했던 적도 솔직히 있었다.

하지만 왕할머니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혼자 매일매일 나는 자연인이다 TV만 틀어두고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만 계셔야 한다니 얼마나 답답하고 심심하실까 싶어졌다.

이제 귀도 어두워지셔서 전화통화는 점점 더 쉽지 않아 지고

기력이 없으신지 조용히 침묵하는 순간들이 더 잦아질수록

손녀의 입장에서 마음이 아파왔다.


이제 나의 왕할머니에게 유일하게 웃음을 주는 건 5개월 그녀다.

왕할머니는 5개월 그녀와의 영상통화가 유일한 인생의 낙이라고 하셨다.

둘 다 침대에 누워서 서로 영상으로 얼굴을 맞대고

5개월 그녀는 이해할 수 없는 폭풍옹알이로 대화의 문을 연다.

그러면 90살 왕할머니는 존재하지 않는 외계어로 5개월 그녀와 대화하신다.

나만 이해하지 못하는 대화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오늘은 평소에는 쑥스러워서 못하는 말들을 5개월 그녀가 하는 말처럼 포장하여 전한다.


"왕할머니 건강하셔야 저 곧 만나죠.

오늘도 좋은 생각 많이 하세요.

사랑해요."


내일은 90살 왕할머니와 5개월 그녀가 영상통화를 할 때, 화면녹화를 하나 해두려고 한다.

두 아들이 본인들의 엄마의 노래 부르시는 모습을 촬영하던 모습을 보니 나도 기록을 남겨두고 싶어졌다.

왠지 왕할머니와 5개월 그녀의 영상통화하는 모습이 언젠가는 그리워질 수 있을 거 같아서 말이다.


p.s. 이 글을 쓰고 나니 아무리 멀어도 5개월 그녀를 데리고 왕할머니에게 가야겠다 싶어 졌습니다.

더 추워지기 전에 왕할머니의 품에 5개월 그녀를 안겨드리러 가야겠습니다.

아무리 멀어도 말이죠.



이전 06화 건강하렴. 건강하게만 자라주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