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인터넷에 자주 보이는 ‘낳음 당함’이라는 말을 생각해 본다. 부모가 책임질 수 없다면 차라리 아이를 낳지 말았어야 했다는, 일종의 반출생주의적 선언이다. 매년 어버이날이면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를 외치며 부모님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드리던 나 같은 세대에겐 낯설고도 당황스러운 표현이다.
과거 개발도상국 시절,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처럼 우리나라는 모두 사정이 비슷했다. 다들 힘들었지만 그래도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은 있었다. 부모들은 억척스럽게 일하며 자식을 키워냈고, 우리는 그 노력에 감사하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아이를 키우는 현실의 벽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사랑만으로 충분하던 시대는 멀어졌고, 이웃의 범위는 동네를 넘어 전 세계로 확장됐다. SNS만 열면 중동의 만수르부터 삼성 이재용 회장의 유학 간 딸까지, 남의 화려한 삶이 눈앞에 펼쳐진다. 한국에서 집값은 치솟고, 물가는 뛰는데 양육비는 빠듯하다.
경쟁은 더 치열해졌고, 실패는 곧 낙오로 직결된다. 과거엔 “교과서만 봤어요”라는 서울대 합격 수기가 통하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집안의 물적 지원 없이는 공부로 성공하기도, 취업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기도 어렵다.
미디어와 커뮤니티는 연일 ‘ADHD’, ‘금쪽이’, ‘자폐아’ 같은 자극적 콘텐츠로 육아의 고통을 극적으로 소비한다. 출산은 기쁨보다 위험한 선택으로 포장된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아예 시작조차 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나는 알지도 못한 채 태어나 날 만났고,
내가 짓지도 않은 이 이름으로 불렸네.
— 이소라, 〈Track 9〉
가수 이소라의 노래처럼 우리는 모두 하이데거가 말한 ‘피투(被投)’된 존재다. 누구도 자신의 의지로 태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태어난 이상, ‘기투(企投)’를 하기 위해선 사회적 안전망이 필요하다. 그러나 요즘 한국은 자본 없이는 기회조차 허락하지 않는 것 같다.
‘낳음 당함’은 결코 배부른 시대의 투정이 아니다. 모두가 풍요로워 보이는 세상에 유독 자신만 배고프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증거다. 처음엔 자녀 세대의 자조에서 시작된 말이었지만, 이제는 부모가 되려는 세대에게 출산을 주저하게 만드는 정서적 트리거가 되고 있다. 단순히 ‘낳을 수 없다’가 아니라, ‘아이의 미래를 물질적으로 책임질 수 없다면 낳지 않겠다’는 차갑고도 이성적인 판단이다.
2025년 5월 8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