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다섯,내면아이 마주하기
마흔다섯, 여전히 내 안에서 어린아이가 우는 소리가 들린다. 늘 그랬듯 꿀꺽 삼키는 소리 없는 울음이다. 나의 유년기는 땅을 반쯤 파고 내려간 비밀 창고 같았다. 두서없이 적치된 물건들처럼 이런 감정, 저런 감정이 정리되지 않은 채 쌓인 그곳에 ‘자라지 않는 아이’가 웅크리고 산다.
당신 최초의 기억은 무엇인가, 당신 최초의 상처를 기억하는가. 아마도 사람들은 대부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살아가며 마주하는 모든 경험이 흉터처럼 새겨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흉터는 덧바른 분장으로도 감춰지지 않는다. 나는 40년째 여전히 마음이 힘들다. 이 오랜 세월 동안 나는 그때의 부모님 나이를 따라 먹었고, 뒤늦게서야 마음껏 겪지 못한 사춘기를 앓고 있다.
충분히 사랑받지 못해 외로웠고, 그 사실이 얼마나 고통을 반복하게 하는지 너무나 잘 안다. 요즘 들어 부쩍 어린 시절을 돌아보며 나의 내면아이를 대면하고 자꾸 손을 내밀게 된다.
현재의 내 삶은 비록 곳곳에 이가 나가고 해묵은 균열이 여전하나, 인간이라는 존재가 깨지고 다치는 게 얼마나 쉬운 일인지, 그것이 나에게뿐 아니라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인지, 껍데기만 어른인 채 서럽게 울음 우는 내면아이들이 얼마나 많이 살고 있는지. 세월을 통해 배우고 깨닫는다 .
심리치료사이자 트라우마 치료 전문가인 다미 샤르프는 <당신의 어린 시절이 울고 있다> 라는 저서에서 ‘삶은 누구에게나 힘든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했다. ‘내 몸에 이미 배어버린 오랜 상처’는 결코 혼자서 치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와 접촉이 그 치유의 핵심 과정임을 강조한다.
나는 가장 가까운 ‘타인’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또 다른 타인의 마음으로 어루만질 수 있다고 여긴다. 행복한 가족드라마에서나 나올 것 같았던 따스한 엄마·아빠를 사회에서 만난 다른 어른에게서, 책 속의 인물에게서 얻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간다.
언젠가 한 지인이 내게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다.
현실 속의 내 엄마가 차갑고, 어렵고, 상처만 주는 사람이라면, 사랑이 넘치는 엄마가 나오는 책을 찾아 읽어보라고. 필자가 세상의 딸 아들에게 다정히 전하는 삶의 메시지들을 내 엄마가 해주는 말로 걸러 들어보라고. 그렇게 한 권 두 권 찾아 읽다 보면 내게는 좋은 엄마·아빠가 하나도 아니고 여러 명 생기는 게 아니겠냐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날, 나는 더 이상 예전만큼 아프거나 속상하지 않았다. 지인의 말처럼 생각을 바꾸니 곪은 상처로 들끓었던 마음들이 가라앉는 듯했다. 내게 인생의 값진 조언을 해주고, 힘든 순간을 위로해주며 괜찮다고 말해주는 “내 편”을 지금도 부지런히 찾아가고 있다. 천군만마가 부럽지 않다.
나는, 솔직하지만 거북할 수도 있는 사사로운 고백으로 채워진 이 책이, 누군가에겐 배부른 투정으로 비칠 지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이 한 권의 지난한 집필 과정은 나의 내면아이에게 따사로운 볕을 내어주는 통로가 될 것이라 믿는다. 더불어 당신의 서러운 내면아이에게 용기를 주고, 부정되고 억제된 오래된 감정들로부터 해방되는데 이 글이 작은 도움이나마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