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기억의 오류였으면...

부러진 우산과 쇠막대

by HeySu







어쩌다 친구들과 어린 시절 이야기를 나누게 될 때가 있다.

나의 속은 드러낼 수 없어 친구들의 어릴 적 귀여운 이야기들을 가만히 듣고 있는다.

친구의 이야기 속 어린아이에 내 얼굴이 겹친다.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예쁜 신을 신고 생글생글 웃어대며 한낮의 놀이시간에 열중하는, ‘세상 걱정할 것 하나 없다’는 듯한 표정을 한 어린아이를 머릿속으로 그려낸다. ‘어린이’를 떠올리면 연상되는 자연스러운 장면의 하나처럼 평범한 가정에서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가끔은 눈물 콧물 쭉 빼며 혼구멍이 난 뒤에 엄마·아빠 품에 안겨 오는 아이.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친구가 말했다.

부모님은 당시 흔치 않던 맞벌이였고, 집에서 오빠와 단둘이 저녁까지 엄마·아빠를 기다리는 시간은 길었지만, 부모님이 정말 자기를 사랑하시고 고이고이 키우셨다고, 정말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고, 그래서 늘 감사하다면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초등학교 하교 후 자주 그 친구 집에 놀러 가곤 했는데 가끔 뵙게 되는 어머니가 늘 친절하고 다정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내 친구는 그때의 어머니처럼 미소 짓고 웃는다. 그녀의 표정이 엄마와 똑 닮아서, 그래서 난 감동한다.


나의 기억은 친구와는 다른 눈물을 불러온다. 당혹감과 혼란, 포기와 같은 감정으로 나를 방어하고 감출 일이 많았던 내가, 과거의 시공간에 무수히 존재하고 있다.

영화 <인터스텔라> 의 장면처럼 5차원의 공간이 펼쳐진 격자 형태의 시공간이 내게도 존재한다면, 겁에 질려있거나 눈만 껌뻑대며 무력감을 느끼는 무수한 나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언니가 집에 있는 날이었다.

중학생인 언니는 무슨 일인지 엄마에게 엄청 혼이 나고 있었다. 엄마는 특유의 그 내지르는 고함을 지르며 언니를 혼냈다. 한창 이어지는 싸움 아닌 싸움에. 눈치 보며 방 안에 있었다. 거실에서 들려오는 고함과 언니가 대답하는 소리에 내 심장도 마구 쿵쾅댔다. 다른 날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인 것 같아 조마조마했다.

‘오늘은 특별히 더 조심해야지.’ 생각했다.


우당탕탕 소리가 나며 바깥이 소란스럽다. 빼꼼히 문을 열고 그 틈으로 지켜보았다. 언니가 현관을 열고 마당으로 뛰어나갔고 엄마가 바로 뒤따라갔다. 나도 모르게 뒤를 좇아 달려 나갔다.

현관을 지나 대문까지 이어지는 기다란 마당 통로를 통해 언니가 집 밖으로 뛰어나가고 있다.

엄마는 마당 한 쪽에 있던 쇠 막대를 들더니 언니가 달려 나가는 방향을 향해 창던지기하듯, 던졌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내가 뭘 보고 있는 건가 싶었다.

날아가는 막대의 동선을 따라 내 시선이 이동하며 눈은 휘둥그레지고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언니가 맞아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

곁에 있던 엄마의 눈빛이 너무나 무섭고 두려웠다. 선 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엄마는 도대체 어디까지 얼마만큼, 우릴 싫어하고 미워하는 걸까 생각했다.


언니는 무사히 집 밖으로 빠져나갔고, 나는 남았다.

엄마는 여전히 화가 잔뜩 난 채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체념하듯 내 발걸음도 뒤따라 집 안으로 향했고, 한참 동안 내 심장 소리는 온 머리를 쿵쾅쿵쾅 울려댔다.

막대는 빗겨나가 언니의 뒤통수는 멀쩡했고, 난 정말 정말 다행이라고 몇 번씩 속으로 되뇌었다.

그날 이후 계속 생각하게 된다. 어린 시절을 회상할 때면, 이날만큼은 나보다 언니가 더 걱정된다. 두려워 묻지는 못했지만, 언니도 이날을 기억하고 있을까? 기억한다면 너무나 아픈 기억이 아닐까 싶어 마음이 저릿저릿하다. 헐레벌떡 달려 나갔던 언니 뒤에서, 내가 보았던 그 막대의 포물선을 언니가 보지 않았던 거라면 좋겠다.


무섭게 시끄럽던 일이 마무리된 뒤, 엄마를 뒤따라 들어가다 마당 구석에 버려져 있는 알록달록한 우산에 저절로 눈이 갔다.

그 우산은 며칠 전 큰언니가 혼날 때 쓰였던 것이다.

언니는 우산 대가 다 부러지도록 많이 맞았다. 울고 도망 다니며 혼나는 언니를, 돕지 못하고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날도 그랬다.

‘하지마, 그만하세요’ 왜 나서서 말하지 못했을까...



우리 집 거실은 빛이 훤히 들지 않아서, 체리 빛 목재 인테리어가 항상 더 붉게 보였다.

해 질 녘이면 집안으로 젖어 드는 붉은 어둠이 싫었다. 어둡고 침침한 그 집이 엄마의 화를 더 돋우고 우리를 더 우울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난 그 집이 참 싫었다. 하지만 들어가야만 했고 내가 갈곳은 이곳뿐이었다. 난 언니처럼 대들지도 못하니까.



어떤 기억은 정말 징글징글하게, 아물지도 않는다.




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됩니다.


한강,<소년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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