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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취함존중 May 08. 2017

술로 빚은 옥구슬에 취하다(2)

경기 대부도 특산주 - 경기 무형문화재 옥로주

예전에 술 배우면서, 그리고 이후 일했던 교육기관에서 발효실에 수강생들이 빚어놓고 안 찾아간 술이나 대량으로 남아놓고 살짝 제성하는 시기를 놓쳐버린 술들을 대량으로 3박 4일 동안 몇 번이고 증류해 본 적이 있는데 아마 그 양이 1톤은 족히 넘었던 것 같다. 1톤 증류해 봐야 마실 수 있는 증류주의 양은 많아야 15L 정도다.


그때 증류했던 술이 원료로 따지자면 쌀에서 보리까지, 단양주에서 삼양주까지, 과실주에 맥주까지 종류도 참 다양했는데 발효 시기가 살짝 지나 그냥 마시기에 다소 신맛이 나는 술들을 증류했을 때 꽤 맛과 향이 좋았다. 숙성 이후의 맛 역시 비교해 보아야겠지만 증류 막 했을 때가 보통 불맛이라고도 화기(火氣)라고도 하는 특유의 강하고 똑 쏘는 쓴맛 때문에 가장 맛이 없을 때라 그 맛 좋음의 순서가 숙성 이후라고 크게 달라지는 일은 좀체 없다.  


그렇다고 신맛나는 술이 증류했을 때 전부 맛 좋은 건 절대 아니다. 오래된 일이긴 하나, 개인적인 추측으론 당시 발효실 온도가 20도를 넘어가는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저온에서 장기 숙성된 신맛이라 증류 후에도 그 맛이 괜찮지 않았나 싶다.


보통 술을 망치고 나서

증류하면 되지 뭐~


라고 하는데


발효 제대로 안된 술이 증류한다고 맛날 쏘냐!? 미숙성이든 과발효든 증류 전 맛 없는 술은 증류해도 맛 없다. 내 혀 건다. 주변에서 이런 말 하는 자 있거든 이 글을 보여주고 저의 혀를 걸어 보자.

(술펀 하면서 신체 부위 너무 많이 걸었다. 답이 너무 확실해서 잃을 일은 없겠지만 -_-;;;)




매일, 심지어 주말까지도 돌아가는 막걸리 공장과는 달리 약주나 증류주 양조장들은 그렇게 자주 술을 담지 않는다. 특히 여름처럼 날 더울 때는 한달에 한번도 채 안 빚을 때도 많다. 물론 근처 어느 날 술을 빚을 예정이셨겠지만 마침 주막특공대 취재일에 딱 맞추어 밑술을 담기로 하신 것 같다. 현재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는 유민자 선생님의 동생이자 정재식 전수자의 삼촌되는 분까지 총동원되어 옥로주 집안의 비기 송출에 나섰다.


우리가 도착한 시간이 오전 9시가 갓 지날 때 쯤이었으니 아마 한 시간도 더 전에 온 가족 출동하셔서 부산을 떨고 계셨으리라. 사진에 보이는 회색 개량 한복을 입으신 분은 현 기능보유자이신 유민자 선생님의 남동생이자 전수자 정재식 분의 외삼촌인 유재근 선생님이다. 술을 빚는 날은 이렇게 세분이 모두 모여 작업하실 때가 많다신다. "나 보다 삼촌이 랑 엄니가 훨씬 낫다"시며 겸손해 마지 않는 정재식 전수자, 예술가의 혼이 깃든 술이어서 그 맛이 더욱 술 다운 걸까?


옥로주를 전수 받으며 가장 힘든 것 중에 하나가 삼촌과 엄니의 '감(感)'이라고 한다. 뭔가 명확하고 뚜렷한 수치(발효실 온도, 날짜, 시간 등)나 구체적인 방법이 있는 게 아니라 그저 오랜 세월 몸과 육감에 의존한 직감으로 술덧이나 증류의 시기, 숙성 시간 등이 미묘하게 차이나는데 도무히 이걸 따라잡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발효실과 증류실 앞에는 기록지와 온도계, 습도계가 설치되어 있었으나 어느 해 여름에는 예정 보다 빨리, 어느 해 겨울에는 생각 보다 늦추어 술을 빚고 거르는 그 세세한 방법을 도저히 알아낼 방도가 없는 것이다. 그저 삼촌과 엄니가 시키는 대로, 간혹 "아니 엄니 대체 뭘 어쩌란 거요?"하고 짜증도 부려보지만 늘상 돌아오는 답은


아, 인석아, 여적 그걸 모르겄냐? 지금 걸러야지.


마치 온도계, 습도계가 달려있는 것처럼 측정하지 않고도 감으로 발효실 상태를 알아 맞추고 적절하게 조정을 한다고 한다. 꽤 오랜 기간 교편을 잡고 학생들을 가르쳐 온 경험이 있는 정재식 전수자도 이 부분에서 만큼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고.

"난 이 분들 기준을 몰겄소잉!"


한편, 숙성실에서는 증류가 한창이다.

증류 영상은 1편에 올렸으니 안 보신 분들은 여기서 직접 옥구슬 받는 모습 한번 살펴 보시길 -

https://brunch.co.kr/@ssoojeenlee/32


옥로주는 유씨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술이라고 한다. 유민자 선생님 대(代)에서 아들인 정재식 선생님께 이어지면서 정씨네 술이 되었다. 이거 참, 다들 잘 모르는 얘기지만 문화재 집안 뒷이야기들을 들추어 보면 사실 형제자매끼리 꽤나 싸움도 끊이지 않는 편이다. 술은 아무래도 제품성이 있어 재산으로서 가치를 지니므로 국악, 전통무, 공예처럼 특출난 제자(물론 제자가 자식일 경우도 있지만)에게 가는 경우보다 대대손손 물려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친족이나 형제간 끼리의 다툼, 심지어 부부간 불화로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이런 술들에 정이 가지 않는 건 다만 본인의 기분 탓이겠지, 탓이겠지, 탓이겠지...


©김 기자

똑똑 떨어지는 술을 감질나게 도자기 잔에 받아 셋이 돌아가며 "나도나도"를 외치며 한 모금씩 홀짝 거린다. 요렇게 술 마시고 도수 맞추는 건 내 취미이자 특기다. 태생이 내기를 좋아하는 지라 -_- 사실 도수 뿐 아니라 제조 방법이나 원료 맞추기도 항상 제조자의 설명을 듣기 전에 먼저 물어보는 편이다.


음, 57~58%?


나머지 두 김씨들은 그 정도는 안 될 것 같다며 40%대를 말한다.


아니야. 이건 확실히 50% 넘는다.
잘 하면 60% 넘을 수도 있음 ㅇㅇ


2년 전에 여기서 70%짜리를 마셔본 적이 있다. 장어매운탕과 함께. 내가 기억하는 가장 맛있는 70% 이상 증류주(물론 시판되고 있지 않다)는 한국에서 두 군데있는데 그 중 하나가 옥로주다.  70도가 넘는 술을 가장 널리 알려진 바카디 151인데 무려 75.5%나 된다. 섞어 마시지만 않으면 더 좋을 텐데 본데 '호기'라는 게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간 상태에서 발휘되는 헛된 부심이기 때문에 턱 정도까지 꽐라된 상태이거나 '이걸 안 마시고 내 너에게 술로 질 순 없다'는 쓸데없는 승부심으로 눈을 부릅뜨고 마시는 게 독주 앞에 흔한 상황이기 때문에 마셨으면 영혼과 정신을 길 거리에 내 놓기 전에 말간 얼굴로 얼른 집으로 들어오는 게 상책이다.


자, 직접 한번 측정해 보자. 방금 받은 옥로주를 주정계에 넣어 본다. 50도짜릴 넣었더니 바로 풍덩~

90도 눈금을 넣었더니

 


옥로주의 맛과 향은 소싯 적에 몇번 호기롭게 마셔 본 바카디 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래서 우리나라 수제(?) 증류주 몇번 마시고 나면 본의 아니게 퍼런 병에 든 희석식 소주를 마실 수 없게 된다. 나? 요즘은 소맥만 마신다. 예전에 과일 몇 조각에 소주만 홀짝 거리던 난데 아무리 말술 마시던 나라도 희석식 소주 특유의 에틸 알콜향을 이제는 도저히 못 견디게 되었다. 그러게 방방곡곡 양조장 마다 고이 감춰 둔 최고급 술들만 맛 보고 다니는데 넘어갈 리가 없잖은가? 내 안에 너 있다. 아니,


내 입에 혀 있다.


옥로주는 여과를 많이 하지 않고 탁한 상태에서 바로 증류한다고 한다. 그래서 이 깔끔한 맛이 더욱 놀라운 것이다. 알콜의 끓는 점은 섭씨 78도이고 물 보다 낮은 끓는점 차를 이용해 발효 후 13~19%에서 보다 더 높은 순수 알코올만을 추출해 내는 게 증류 과정인데 부유물이 많을수록 탈 것, 눌어붙을 것이 많다는 뜻. 말인 즉슨 물, 알코올 보다 비중이 높은 부유물들이 가라앉아 먼저 끓거나 익으면서 잡내, 혹은 군내가 섞일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에 희석식 소주의 무미, 무취에 적응된 한국 현대인들 입맛에 환영받지 못할 가능성 역시 함께 높아진다는 얘기다. 또한 단발효 방식의 와인, 과실주를 증류하면 단순한 맛이 나지만 병행복발효를 거치는 우리나라 전통 술, 탁약주의 경우 여러가지 복합적인 향과 맛이 뒤섞여 있어 가열 후 원하는 좋은 맛과 향만을 추출해 내기가 몹시 어렵다.


이왕 놀라는 한번 더 놀라 보자. 옥로주는 상압식 증류법을 쓰고 있다. 간단히 설명하면 알코올의 증류에는 상압(대기압=1기압)에서 추출하는 방식과 낮은 압력에서는 끓는점도 내려가는 현상을 이용한 감압 방식 두 가지가 있는데 상압에서 끓는점까지 갔을 때 분해되는 물질이 많아지기 때문에(위에 잠깐 나온 부유물과도 비슷한 이치) 이취, 잡내가 섞이기 쉽다. 위스키나 브랜디 등 대부분의 서양 증류주는 감압 방식을 택하는데 그들은 오크통 숙성을 거치기 때문에 부족한 향과 풍미를 여기서 보충시킨다. 감압 증류 방식으로는 아무래도 깔끔하고 단순한 맛과 향을 낼 수 밖에 없는데 전통 소주고리로 내려 가열 온도가 높아 곡주 특유의 꼬릿한 향이 나는 증류주 보다는  희석식 소주에 익숙해진 소비자들 입맛에는 감압이 훨씬 쉽게 받아들여진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대부분의 증류식 소주들, 화요, 안동소주 등은 대부분 감압식이며 조옥화 안동소주만이 상압식을 택하고 있다. 그만큼 상압으로 균형감있고 깔끔하게 좋은 맛내기가 쉽지는 않다는 반증이기도 하겠지. 송명섭 장인의 죽력고가 대표적인 상압식 소주인데 이렇 듯 상압 추출 술들은 호불호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경우가 많다. 본인은 방식 자체를 선호한다기 보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일단 '맛있는 술'이면 장땡이나 다만 그 맛내기에 있어 상압이 훨씬 까다롭다는 건 경험상 매우 잘 알고 있다. 옥로주의 맛은 사실 전형적인 감압 소주에서 나는 깔끔하고 이취가 없는 술이라 녹음 파일이 있으면서도, 현장에서 몇번을 확인하고서도 이 글을 쓰는 순간까지 문자로 다시 확인할 정도였으니...


옥로주 술병&술잔의 변천사


이 부분에서 나는 옥로주에 높은 점수를 주는데 문배주나 삼해소주처럼 잘 빚은 여러 증류주들은 그 특유의 맛과 향 때문에 매우 빨리 이 술이 누구네 집 어떤 술인지를 감별할 수 있다. 이건 장점일 수도, 단점일 수도 있는데 이를 테면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매우 쉽게 호오가 파악되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인 경우가 있고 아무리 만나도 속내를 파악하기 힘들다가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진국이네' 싶은 사람이 있다 치자. 옥로주는 비유하자면 마치 후자의 사람과 같은 타입인 것이다. 그리하여 옥로주를 한 모습 머금은 모 시인 曰,


맛없이 맛 내기가 가장 어렵다.
대악필간(大樂必簡), 큰 즐거움은 반드시 간결하다.


고 하였던가? 뭐라 콕 찝어 말할 순 없으나 자네 참 호감은 가는데 속을 다 보여주진 않아 봐도봐도 질리지 않고 한번의 만남으로도 여운이 남아 꽤 오래 잊고 살다가도 때가 되면 자연스레 생각나는 그런 사람, 평생을 마셔도 질리지 않고 좋은 사람을 만나면 어김없이 생각나는 그런 술이랄까.  


아침 8시 부터 마신 술에 채 깨기도 전에 어수선한 인터뷰는 대강 마무리 되었고 정오가 되기 전, 유민자 장인 따라 일요일 브런치 대신 백주 대낮도 채 되기 전, 술맛 돋우는 요리집(?)으로 2차를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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