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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날 Nov 27. 2023

마흔 셋 친구들이 마라톤을 뛰는 이유

내 나이가 마흔 셋일 때의 이야기다.


혈기 왕성했던 20-30대에도 뛰지 않던 애들이 요즘 왜 뛰는 걸까.

심지어 마라톤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한 녀석이 이번에 10km로 도전한다니, 이 친구들과 얘기하고 있으면 마라톤이 무슨 ‘딸랑이’처럼 가볍게 느껴진다. 고등학생 시절에도 그랬다. 공부 잘했던 이 얘들이 '공부가 힘들다'라고 말한 건 기억나지 않는데, 하여튼 시험만 보면 실력들이 좋았다. 그러 보고니 얘들에게 해줄 말이 떠오른다. 눈을 옆으로 쭉 째려보며,  



얘들아
공부가 무슨 딸랑이니!



얘네들은 태어나길 머리가 좋은 걸까, 마음이 평온해서 성취도가 높은 걸까, 아니면 그냥 독한 걸까?! 참 연구대상들이다. 같은 고등학교에서 같은 반, 옆 반 하면서 같이 얼마나 깔깔거렸는지 모른다. 말 그대로 굴러가는 낙엽을 보며 웃었다. 그렇게 깔깔거리던 꼬맹이들이 이제 모여서 주름을 걱정한다. 그런데 또 얘들이랑 주름 이야기를 하면, 주름에 대한 걱정이 딸랑이가 된다. '딸랑딸랑딸랑' 몇 번 흔든 거 같은데, 금세 주름을 대하는 마음이 가벼워지고, 해결책까지 손에 쥐어져 있다.


그렇다고, 이 친구들에게 아픔이 없겠나. 삶이 고되지 않겠나. 친구들도 사람들 겪는 것들을 다 하고 있긴 한데, 만나면 드라마 얘기나 하며 시시덕거린다. 그러다가 누가 '살면서 어려운 문제'를 이야기하면, 순간 그것에 몰입해서 쑥덕쑥덕 난도 높게 이야기를 나눈 뒤, 다시 최근에 본 드라마 이야기로 돌아간다. 삶의 강약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아... 하!!! 그러고 보니 얘네들, 같이 시시덕거리다가도, 공부할 때는 밀도 높게 공부했었다. 때론 불도저 같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게 답일런지도..  


강, 약, 중강, 약!



이번에 마라톤을 뛰고, 우리도 나름 뒤풀이라는 것을 했다. 이미 핫한 지 오래된 '망리단길'에 들렸는데, 모두 그 거리가 처음이라더라.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너희 그동안 바빴구나!"라는 말로 하이파이브를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다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치열하고, 충실했던 10년을 살았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망리단인지 맹리단인지 남들에게 핫하다는 것보다, 이 친구들은 자신이 일구고 있는 밭에서 씨를 뿌리고 작물들을 지키는 것이 중요했을 게다.


내 마흔셋 친구들은 자신을 중심으로 두고, 강 약 중강 약 속도에 맞춰서, 자신의 세상을 충실하게 일구고 있다. 중요한 것들은 취하고, 불필요한 것들은 우선순위를 낮추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 이런 기술이 한순간에 연마되었을 리가 없다. 곁에서 지켜봤을 때, 이 친구들은 고등학생 시절부터 이런 새싹들이었다.



자신의 은하에서 중심을 사는 녀석들!



다시 마라톤 이야기로 돌아와서, 이미 훌륭한 이 친구들은 그래서 왜 뛰기 시작하는 걸까?!

궁금하니까 직접 물어봤다. 볼꼴 못볼꼴 상관없는 사이라 그런가, 낯간지러운 질문도 나는 그냥 툭 던진다. "너희는 마라톤을 왜 뛰니?"라고. 그럼 또 핵심만 취리릭 뽑힌, 짧고 굵직한 답이 돌아온다. 농담은 농담으로, 진지는 진지로 응대해 주는 센스를 갖춘, 멋진 녀석들!



힘든데, 뛰다 보면 살아있는 느낌이 들어.
성취감이 느껴지고
 그게 모여서 자존감도 회복되고!



이 친구들이라고, 지난 10년이 만만 했겠는가. 똑같이 지난 10년을 살아오느라 소진되었고, 지쳐있을 거다. 그러므로 새롭게 10년을 살아갈 힘이 필요하겠지! 목표하는 점을 찍고 거기에 도달하고 나면, 새롭게 나아갈 점이 필요해진다. 새로운 점이 없다면, 갈 곳을 잃고 방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실한 친구들이기에, 다들 고등학생 때 찍은 그 점들에 도달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또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친구들이 점을 찍는 중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혹은 점찍을 힘을 모으고 있거나.


나이 마흔, 40대는 그런 시기이다. 지금까지 내가 지나온 길을 점검하고, 새롭게 힘을 내서 다시 나아가는 시기! 이 쌀쌀한 날씨에도 아침 댓바람부터 눈물까지 흘리며 뛰는 친구들을 나는 응원했다. 그리고 내가 살아오고, 앞으로 살아갈 지점들에 대해서도 떠올려봤다.


마라톤은 '주자(뛰는 사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누구 한 명만 출전하는 마라톤 경주는 본 적이 없다. 함께 뛰는 사람과 뛰는 사람을 응원해 주는 '지원군'이 늘 존재한다. 후자들이 중요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동네에서 혼자 뛰지 않고 굳이 비용을 드려서 경기에 출전하지 않겠나. 내 생각에 나이 마흔에는 이런 '지원군'도 중요하다. 여기저기 노화가 시작되는 건강에 대한 것이며, 약해지는 부모를 대하는 일이며, 사춘기를 겪는 자녀에 대한 것이며, 위기감이 높아지는 직장 업무에 대한 것이며.. 이런 새로운 환경에서 내가 힘을 내기 위한 지원군이 곁에 있도록, 관계를 허락하는 것은 삶의 지혜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딸랑이 친구들아, 사랑한다. 뛰느라 애썼다.



   

2023 LIFE MARATHON 현장 스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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