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늘빛바다 Dec 23. 2023

두 명의 엄마

나에겐 엄마가 두 분이다.

한 분은 날 낳아준 엄마, 그리고 또 한분은 이제 이 세상에 안 계신 나의 할머니이다.


시할머니 그리고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았던 엄마는 집안일하기에도 늘 바쁘셨다. 또 세 살 터울의 동생이 엄마에게 늘 껌딱지처럼 붙어 있어서였는지 몰라도 난 항상 할머니와 함께 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반 친구들과 줄 맞춰 하교하던 중 ( 당시 담임 선생님께서 반 아이들을 두 줄로 세워 교문까지 하교 지도를 해주셨다. ) 어딘가에 걸려 넘어졌다. 왼쪽 이마가 깨졌고 양호선생님께서는 아마 꿰매야 할 것 같다고 하셨다. 담임선생님께서는 부모님께서 오실 거라며 울고 있는 나를 안심시키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찾아온 건 다름 아닌 할머니였다. 그 길로 할머니께서는 나를 업고 집으로 향하셨다. 당시 우리 집은 언덕배기 위에 있어서 가파른 언덕 하나를 올라가야 했었는데 환갑이 넘으신 할머니가 21킬로나 되는 손녀를 업고 이십 분이나 걷고 또 걸으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다리가 다친 것도 아닌데 왜 업으셨을까, 난 또 왜 그냥 업혀있었던 걸까.

할머닌 그저 울고 있는 손녀가 안타까웠고, 난 할머니등이 따뜻했을 뿐이었을 거라고 추측해 본다.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할머니에 대한 애착의 정도가 커져갔던 나는 아무도 모를 혼자만의 고민에 휩싸이기도 했다.

어느 누군가가 “넌 엄마가 좋아? 할머니가 좋아? “라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당시 내가 생각한 정답은 “엄마” 였지만 내 진짜 대답은 “할머니” 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엄마에게 너무 미안해서 혼자서 바보같은 속앓이를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히 남아있다. 지금껏 그 질문을 내게 건넨 사람은 한 명도 없었지만, 아마 누군가 물었다면 그냥 울어버렸을 것이다. 그만큼 어린 나에게 그 질문은 두려움 그 자체였다.


중학교 졸업 무렵 갑작스레 가정형편이 어려워진 탓에 엄마는 생활전선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고. 그때부터 집안에서 할머니가 정말로 엄마 역할을 대신했다. 엄마는 나에게 서 조금 더 멀어졌고, 그렇게 고등학교 3년 대학교 4년의 시간이 지나갔다.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임용이 된 나는 경기도에서 지내게 되었다. 혼자 지내게 된 나를 걱정하는 할머니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내게 전화를 해 나의 안부를 묻곤 하셨다.

겨울 방학이 되어 집으로 내려가기로 한 날이었다. 학교에 가서 마무리할 일이 있어 얼른 움직였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날 아침은 여느 때와 다르게 눈이 떠졌는데도 일어나기가 싫어 누워서 뒹굴거렸다. 그러면서도 뭔가 모를 불편감을 느꼈는데 아마도 그 일이 일어나려고 그랬던 것 같다.


학교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할머니께서 위독하시다는 전화였다. 당시 할머니께서 병원에 입원해 계셨는데 건강상태가 양호해져 퇴원날짜를 보고 있던 참이었다. 그래서 마음을 놓고 지내고 있었는데 위독하시다니… 학교일을 정신없이 정리하고 교무실에서 나가려는 찰나에 나를 본 동료 선생님이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다. 아마도 내가 울음이 터지기 직전의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집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그저 할머니가 괜찮아 지시길 빌고 또 빌었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중환자실로 들어가 인공호흡기를 한채 의식이 없는 할머니를 마주했다. 할머니 손을 잡고 “할머니, 나 왔어. oo이 왔어. 눈 떠봐. 응? 할머니… 할머니…“  아무 말도 없었지만 여전히 할머니 손은 따뜻했다. 그러고는 몇 분쯤 흘렀을까? 삐——— 하는 소리가…그 듣고 싶지 않은 그 소리가 내 귀에서 윙윙댔다.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주변은 조용했다.


난 “왜, 왜, 다 가만히 있어! 왜 아무것도 안 해! 뭐라도 해야지! “ 하며 소리쳤다.

울부짖는 나를 오빠가 옆에서 붙잡았고 아빠는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소리치는 내게 오빠가 말했다.


“아빠가 아무것도 안 하기로 결정하셨어. ”


난 아빠를 쳐다봤다. 아니 내 인생에 처음으로 아빠를

노려봤던 것 같다. 할머니를 살릴 수 있었는데, 기회가 있었는데 아빠가 그 기회를 저버린 것만 같았다.

아빠가 죽을 만큼 미웠다.


염을 하는 날 할머니를 다시 마주했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얼굴은 너무도 평안했고 마치 기분 좋은 꿈을 꾸는 듯  한 얼굴이었다. 당시엔 몰랐지만 아마 마지막에 무언가 처치를 했다면 할머니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빠의 마지막 얼굴이 그랬던 것처럼.


“할머니, 잘 가요. 나중에 다시 만나요. 사랑해요. “


할머니와의 마지막 작별인사 이후로 난 매일 같이 울었다. 마음이 조금 진정되기까지 삼 개월 간의 시간이 걸렸고, 내 나이 스물다섯부터 다시 엄마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항상 내 곁에 계셨던 엄마였는데 어쩌면 내 마음이 엄마를 멀리 두고 있었던 건 아니었었는지 모르겠다. 엄마의 마음과는 다르게 말이다.


태어나 처음으로 엄마에게 음식을 만들어 드렸다. 엄마가 내 자취방에 처음 오시던 날이었다. 무언가 어색하고 쑥스러웠지만 더없이 기쁘고 행복했다. 따스한 엄마의 사랑이 내게 스며들었고, 스물여섯 해 동안 가지고 있던 엄마에 대한 미안함을 조금은 내려놓을 수 있던 순간이었다.


그 뒤로 엄마와의 관계는 더 깊어졌다.

결혼 후 첫째를 낳고 고향에 내려와 살게 되면서 엄마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고, 엄마와의 첫 해외여행에서 단둘이 갔던 구엘공원은 적어도 나에겐 잊을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새벽의 짙은 푸르름과 마치 새것 같은 공기 속에서 엄마와 나는 공원 안을 말 없이 걷고 또 걸었다. 동이 트는 모습을 보려 잠시 멈춰 선 그곳에서 엄마에게 물었다.


“ 엄마, 여기 와서 좋아? ”

엄마는 “좋네. 딸 덕분에 외국에 다 오고 고마워. “

“ 뭐가 고마워. 내가 더 고맙지. “


난 뒤에서 엄마를 끌어안고 한참이나 말없이 해가 떠오르는 걸 지켜보았다. 엄마는 그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아마도 나와 같은 생각이지 않았을까?

떠오르는 태양처럼 서로를 비춰주겠다고.


고향에 내려와 2-3년 정도 살다 다시 원래 살던 곳으로 가려던 계획은 점차 엄마옆에 사는 걸로 바뀌어 갔고, 난 이곳으로의 전근을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3년 전 둘째를 낳고 힘들어하는 날 위해 엄마는 수술한

다리를 이끌고 우리 집에 와주셨다. 그즈음 찍은 사진 속 엄마 얼굴은 편안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엄마는 내색 없이 날 도와주셨고 지금도 여전히 엄마의 사랑은 현재진행형이다.

더불어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오빠와 동생을 위한 돌봄도 함께 말이다.


엄마 그리고 할머니의 헌신적인 사랑을 이 짧은 글에 다 옮겨 담을 수는 없지만 두 분이 내게 준 사랑을 조금이나마 표현해 보고 싶었다.

지금도 저 하늘 위 어딘가에서 날 내려다보고 계실 할머니와 내 삶 속에서 함께하고 있는 엄마, 그 두 분께 온 마음 다해 말하고 싶다.


사.랑.한.다.고…



작가의 이전글 내 맘대로 살아보려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