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사람을 앞지르고 싶다

승부욕을 제대로 발산하고 싶어졌다

by 홍시

3년 동안 다녔던 직장은 여성이 80%, 남성이 20% 정도로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은 집단이었다. 직원들의 화합을 위해 꿀맛 같은 토요일을 반납하고 체육대회를 열었다. 발야구, 피구, 2인 3각 등의 종목을 치루고 피날레를 장식한 경기는 팔씨름이었다. 두 명씩 짝을 이루어 이긴 사람이 위로 올라가는 토너먼트 형식이었다.


나의 신체적 특징을 말하자면 허벅지를 비롯해 하체가 튼실한 반면, 상체는 또래 여자들과 비교해도 외소한 편이었다. 몸통도 작고, 팔목이 손으로 잡힐 만큼 가늘었다. 학창시절 체력검정시험을 보면 다른 종목은 대부분 만점인데, 유독 팔 힘을 이용한 철봉에 오래 매달리기와 팔 굽혀 펴기는 평균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러니 하체로 하는 운동은 자신만만한 반면, 상체로 하는 운동은 의기소침했다.


20대의 직장 동료들은 대부분이 미혼이었다. 다소곳하고 조용조용한 성격의 여자보다는 씩씩하고 목소리 큰 여자들이 많은 편이었다. 여자는 여자끼리, 남자는 남자끼리 팔씨름 예선전이 이루어졌다. 자신 없는 팔씨름이지만, 있는 힘을 다했다. 나보다 체격이 큰 여자, 3살은 어린 젊은 동생까지 너무 어이없게 이겨버렸다. ‘이거 시합 맞아?’ 성의 없는 경기 상황에 기분이 조금 상했다. 그러나, 체육대회였고 소정의 상품까지 있다니 끝까지 해봐야지. 한두 명 제치다보니 결승전까지 진출했다. 이어지는 경기에 팔에 과도하게 힘을 줬더니, 욱신거리는 게 영 신통치 않다. 잠시 쉬는 타임을 갖고 힘을 보충해야 했다. 주변으로 눈을 돌리니, 다들 쉬는 타임에 관심이 없었다. ‘얼른 끝내자, 빨리 끝내고 술이나 마시러 가자’고 말하는 것 같았다.


결승전은 바로 이어졌고, 승부를 앞두고 어떤 긴장감도 없이 내가 우승자가 되어버렸다. 떨떠름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고, 다들 기분 좋게 뒷풀이 장소로 떠난 뒤에도 이상하게 쌔한 느낌이 가시지 않았다. 그렇게 몇일이 지나 뜬금없이 한 사내커플의 탄생 소식을 들었다. 정말 예상치 못한 조합이라 어리둥절했다. 사내커플의 여성은 나와 팔씨름을 했던 상대였다. 그녀는 이기려는 마음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팔씨름에 지고서도 활짝 웃었다. 그제야 섬광처럼 번뜩 눈이 뜨였다. ‘그래, 우리 직장 동료 여성들은 이길 마음이 애당초 없었구나.’ 남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바락바락 이기려고 용쓰는 여자는 없었던 것이다. 힘이 없는 나약함을 내세우는 게 더 사랑스러워 보였을지도.


여성이 남성보다 상대적으로 훨씬 많은 실내 수영장의 분위기도 20대의 직장 분위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특별히 시합이 열리는 경기도 아니고, 서로의 속도를 대충 고려해서 빠른 사람을 앞에 세우고, 느린 사람을 뒤에 세우는 정도이다. 하지만 자유 수영을 하는 날이면 서로의 수영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잘 판가름 되지 않는다. 어쩔 수 없다. 적당히 간격을 유지하면서 갈 수 밖에.


자유형을 뺑뺑이로 도는 사람들은 가끔 앞에서 미적거리는 수영인들을 추월해서 가기도 한다. 실력이 월등하니, 뭐 그러려니 하는 것이다. 나의 자유형도 무르익어 뺑뺑이를 돌 수 있었다. 속도도 그리 늦지 않으니 평소에도 추월을 당하는 경우는 없었다. 애초에 추월을 당할 만한 레일에는 눈치껏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나보다 속도가 빠른 수영인이 수영하는 레일은 처음부터 들어가지 않는 것이 나만의 규칙이었다. 뒤에서 빠른 속도로 쫓아오면 수영에 집중되기 보다는, ‘뒤에서 날 잡으면 어떻게 하지’ 걱정으로 머릿속이 꽉 차 수영을 즐기기가 어려웠다.


적당히 속도가 비슷하거나 느린 레일을 찾아 들어갔다. 나보다 훨씬 느린 속도로 수영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과감하게 속도를 올렸다. 팔을 좀 더 빠르게, 발을 좀 더 빠르게 움직이면 한 사람을 추월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추월을 하면서 내밀하게 파고드는 우월감도 스리슬쩍 맛봤다. 추월은 실력이 월등히 차이가 날 때만 벌어지는 일이었다. 빈번하게 벌어지는 일은 아닌 것이다. 어쩌다, 한 번.


그날도 수영장 레일에 들어가기 전, 분위기를 살폈다. 나보다는 속도가 더딘 레일을 택하는 게 마음 편했다. 한참 자유형으로 나아갔다. 몇 바퀴를 돌았을까, 한참 간격을 벌여서 자유형을 했던 한 남자가 바짝 쫓아오는 게 느껴졌다. 새롭게 들어온 사람인 것이다. 안면은 있었다. 그의 수영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도 대충은 알았다. 이 레일에서 나가야겠다는 판단이 빠르게 스쳤다. 이번 한 바퀴만 하고 나가야지.


그 한 바퀴를 도는데, 남자가 더 바짝 쫓아왔다. 아마도 추월할 모양새였다. 자동차도 추월하려하면 속도를 조금 늦추어 추월을 용이하게 해주듯, 수영도 비슷했다. 뒤에서 나를 추월하려 한다면 내가 속도를 늦춰야 했다. 이성적으로는 그게 맞았다. 그러나 나의 이성은 잠시 작동불능상태가 되었다. 그의 추월에 콧방귀를 뀌며 더 빠르게 발을 놀렸다. 끝에 도달해서야 가뿐숨을 몰아 쉬웠다. 이윽고 뒤에 쫓아온 그의 성난 표정이 보였다. 그는 더 이상 자유형 뺑뺑이를 하지 않고, 나에게 화를 냈다.

“지금 장난하세요! 뒤에서 쫓아오는 거 알면서 그렇게 빨리 가면 어떻게 합니까? 수영 한 두번 하는 것도 아니면서 내 참~”

나는 연신 “죄송합니다, 잘 몰라서 그랬습니다. 죄송합니다” 라며 고개를 조아렸다. 그는 한참 성을 내더니, 어느새 수영장에서 사라졌다. 예상치 못한 그의 분풀이에 놀라고 무서웠다. 수영장에서 서로 불편한 상황이 일어나곤 했지만 대부분 ‘그러려니’ 하면서 넘겼었다.


가슴이 벌렁거리며 진정되지 않았지만, 애써 침착한 척 하면서 배영을 몇 바퀴 돌고 나왔다. 주변에서 이 상황을 지켜본 언니들이 괜히 나를 돕는다고 나서서 큰 싸움이 될 것 같아 더 두려웠다. 작은 동네의 유일무이한 수영장에서의 싸움은 곧 모든 이가 알게 되어버릴 재미난 가십거리였다. 쉽게 떠돌며 입에 오르는 가십에 진실과 거짓은 중요치 않았다. 창피해서 수영장에 발을 들이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은 나를 오싹하게 만들었고, 얼른 사건을 은폐해야겠다는 빠른 결정을 내리게 한 것이다. 지켜보는 언니들에게 “아무것도 아니야, 얼른 수영하자” 재촉이며 배영을 한 것이다.


나를 추월하려했던 그는 나에게 공포를 주었고, 그 뒤에 2개의 선물을 남겼다. 하나의 선물은 추월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추월을 해보기만 했지, 당한 것은 처음이었다. 썩 기분 좋지 않았다. 아주 고약했다. 그 사람이 실력이 좋든, 월등하든 중요치 않았다. 나의 수영을 무시하는 것 같았다. 이전에 내가 스스로 합리화를 하며 추월했던 그이들이 떠올랐다. 미안한 짓을 모른 채 계속 할 뻔했다. 그이들이 ‘그러려니’ 해줬을 테니.

두 번째 선물은 이성을 잠시 망가뜨렸던 나의 승부욕을 발견하게 해준 것이다. ‘이기고 싶다’라는 간절한 열망. 여성들의 집단에서는 딱히 빛이 나지 않는 무용지물이었다. 몸으로 하는 운동일 경우에는 특히 그랬다.


승부욕에 이글거리는 눈빛, 마음을 드러내게 해 준 그 덕분에 제대로 승부를 겨루어보고 싶은 소망을 갖게 되었다. 내안에 잠재되어 있는 승부욕을 동네의 작은 수영장이 아닌, 더 큰 무대에서 당당하게 펼치고 싶어졌다. 나는 광주수영마스터즈 대회에 참가신청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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