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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남자가 문을 두드려요

결혼이라는 강을 건너_1

by 홍시

연차였다. 1년을 오롯이 일하는 사람으로 살고, 보상으로 받은 꿀맛 같은 하루 휴가였다. 텅 빈 하루가 내 것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설렜다. 옥탑에 위치한 방문을 열어 저 멀리 아차산의 산소 가득한 공기가 옥탁방의 방까지 도달하기를 상상하며 콧속으로 들이쉬는 공기를 음미한다. 희연이는 29살로 20대의 후반부 중에서도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내년이면 30살이다. 나이의 앞자리가 3으로 넘어간다는 것에 조바심이 났다. 요즘 부쩍 떨어진 체력을 실감하고 있었다. 집 앞에 커다란 아차산이 있어도 등산을 해본 적은 없다. 산이 좋아서 아차산 근방으로 집을 구했지만,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은 늘 있는 법이다.


오늘은 연차이기도 하고, 급격히 떨어지는 체력을 조금이나마 끌어올려야겠다는 큰맘을 먹고 아차산에 오르기로 했다. 정상까지는 욕심이다. 다리 힘이 허락하는 높이까지만 가기로 했다. 목표는 낮을수록 성취감은 높다. 아차산은 예상했던 것보다는 높지 않았다. 그렇다고 쉽게 올랐다는 뜻은 아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다보니, 욕심이 생겼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렇게 정상까지 다다랐다. 목표를 훨씬 웃도는 성적에 고취되어 가볍게 아차산을 내려왔다.


집으로 곧장 들어가기 전에 들려야 할 곳이 있다. 뱃속은 꼬르륵~ 배꼽시계는 어김없었다. 점심 먹을 때가 지난 듯 했지만, 가까이에 애정하는 분식집이 있으니 관대해졌다. 밀가루로 만든 기다랗게 쭉 빠진 떡볶이에 당면만 가득 든 얇삭한 야끼만두, 그리고 동글동글 매끈한 순백의 계란 하나가 세트메뉴이다. 가격도 아주 소박하고 맛은 기똥차다. 이 떡볶이를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 먹은 사람은 없다. 그만큼 단골도 많고, 맛집으로 입소문이 퍼져 자리는 늘 만석이다. 희연이는 간신히 생긴 빈자리에 털썩 앉아 떡볶이 세트를 흡입했다. 배가 오지게도 고팠던 것이다. 마지막 남은 빨갛게 양념이 밴 떡볶이 하나를 질겅질겅 씹으며 식사를 마친 뿌듯함을 만끽했다.


다리는 금세 무거워져 터벅터벅 옥탑방으로 향했다. 텅 빈 하루를 알차게 채우는 것 같아 대견했다. 희연이의 집은 4층의 철 계단을 올라야 했다. 괜찮다. 옥상을 누구보다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옥탑방이었다. 모은 돈이 얼마 없었던 않았던 그녀는 반지하 대신, 여름에는 무더위에 방안이 지글지글 끓고, 겨울에는 벽면에 결로로 인해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살을 에는 칼바람이 불어 닥치는 옥탑방을 선택했다. 햇빛이 들지 않는 반지하의 어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학교가 끝나고 들어간 반지하 집은 형광등이 켜있어도 어두컴컴한 분위기를 지울 수 없었다. 바닥의 눅눅하고 찬 기운은 뼛속까지 스몄고, 따스한 햇살이 들어올 수 없는 창문은 벽을 마주했다. 옥탁방 살림의 어려움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반지하의 어둠만은 피하고 싶었다.


한 발 디딜 때 마다 부실한 철 계단은 삐걱대며 소름 돋우는 소리를 냈다. 어쩔 수 없다며 계단을 올랐다. 드디어 옥탑방이다. 탁 트이는 하늘과 저 멀리 보이는 아차산의 푸릇함은 옥탁방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였다. 희연이는 그 사치를 맘껏 부리고, 방에 두툼한 이부자리를 폈다. 간만에 오른 등산 덕분에 피로감이 밀려왔다. 낮잠을 자기 위해 커튼을 쳤다. 포근한 면 이불을 몸으로 둘둘 싸며 부드러운 감촉과 함께 슬며시 잠이 들었다.


‘똑! 똑! 똑! 똑!’(문 두드리는 소리)

‘이 시간에 누구지? 올 사람이 없는데.’

“누구세요?”

‘똑! 똑! 똑! 똑!’

“누구세요!”


밖에서 현관문 두드리는 요란한 소리에 희연이는 놀랐다. 궁금함이 아니었다. 평일에, 대낮에, 부른 사람도 없는데 집을 찾아올 사람이 없었다. 공포감이 휩싸였다.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도 돌아오는 대답은 역시나 없다.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는 신경질적이고 날카롭다. 희연이는 낮잠을 자며 꿈을 꾼 것이다. 누구세요? 라는 질문은 입 밖에 내지도 못했다. 소리 없는 아우성. 잠은 깨어지지 않고 그대로 더 깊은 늪으로 빠졌다.


꿈속의 희연이는 창문을 빼꼼히 열어서 밖을 보았다. 낯선 남자 서녀명이 옥상에서 서성인다. 덩치로 봐서는 학생은 아닌 것 같다. 한 남자는 담배를 피워대며 연기를 풀풀 낸다. 두 남자는 속닥거린다. 그녀는 알 수가 없다. 누가 내 방문을 두드리는 건지 도무지 생각해낼 수가 없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얼굴도 모르는 낯선 남자들이 방문을 열고 들어온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소리치고 싶었다. 여기에 사람이 있다고, 그러니 다들 여기서 사라지라고! 도움을 청하고 싶었지만, 아무도 없었다. 혼자라는 사실이 극도의 두려움이 되어 방 안 공기를 순식간에 어둡게 적셨다. 희연이는 가위가 눌린 듯, 움직여보려 해도, 깨려고 해도 일어나지지 않았다. 울고 싶었지만 꿈속에서는 울음도 소리 없이 공간을 맴돌았다.


한참을 꿈속에서 헤매었다. 희연이는 낯선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한없이 연약하고 휘둘러질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강렬한 공포감은 꿈에서 깨고 난 뒤에도 쉬이 가시지 않았다. 그녀가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꿈이란 걸 알게 되면 으레 헛웃음이 나오면서 잊게 되건만, 이번은 그렇지 못했다. 그녀는 밖으로 나가 먼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서울에서 방 한 칸 어렵게 구해 솔로라이프를 즐기려 했던 그녀의 꿈은 높은 하늘로 날아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희연이는 급하게 3년을 사귄 찬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저녁에 시간 돼?”

“응, 무슨 일 있어?”

“아니, 무슨 일은 없는데 할 얘기가 있으니 자주 보던 그 맥주 집에서 보자.”

“그래.”


급박하게 몰아가는 희연이의 목소리에 찬수는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약속에 응했다. 저녁 8시가 약속시간이었다. 10분 먼저 약속 장소에 도착한 희연이는 맥주 한잔과 마른안주를 시켜 시원한 맥주를 한 모금 홀짝였다. 시간이 8시에 다다르자 찬수도 도착해서 가뿐 쉼을 몰아쉰다.


“먼저 왔네.”

“응, 어서 앉아.”

“무슨 일 있어?”

“급한 목소리던데.”

“일단, 맥주 한잔 해”


찬수의 표정을 희연이는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찬수야, 우리 결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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