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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시 Sep 21. 2022

글을 쓰러 카페로 간다

집에서 글을 써보려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되지 않았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텅 빈 집은 고요하다. 글을 쓰면 된다. 단순하다. 하지만 단순하지 않다. 생각만큼 노트북을 펼치기까지의 여정이 쉽지만은 않다. 


주방 개수대에 음식물이 덕지덕지 묻은 그릇들이 수북이 쌓여있다. 시큼한 냄새가 난다. 지금 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고약한 냄새가 주방의 공기를 오염시킬 것이다. 그러니 얼른 수세미에 세제를 묻혀 설거지를 해야 한다. 설거지를 다 했으니 이제 노트북을 펼쳐야지. 아차! 빨래를 돌려놓은 세탁기를 깜빡했다. 세탁기 뚜껑을 젖혀 엉켜서 한 덩어리가 된 빨래를 거두어 하나 씩 풀어내, 햇볕이 가장 잘 드는 곳에 건조대를 펼쳐 옷을 말린다. 개운하게 빨래까지 마쳤으니 끝이겠지. 배가 고프다. 아침도 못 먹었으니, 뭘 좀 먹어야 겠다. 아무거나 대충 먹지 못한다. 이왕이면 따스하고 속이 편안한 음식을 만들어서 먹어야지. 어차피 점심 먹을 거, 조금 빨리 먹는다 생각하고 나무 도마를 꺼내 칼질도 하고, 된장을 풀어 뚝딱 찌개를 끓인다. 간단하게 차린 밥상이지만, 입맛이 돈다. 노트북은 꺼내지도 못한 채 주방에서 한 상 차린 식사를 하고 있다. 


여기서 끝나면 다행이련만, 노트북을 펼치고 싶긴 한 걸까. 누가 다그치는 것도 아니니 마음은 온통 집안 일로 향한다. 집 안에 있노라면 난 영영 노트북을 꺼내지 못할 것 같다. 매번 집에서 글을 쓰겠노라고 작정할 적마다 집에서 해치워야 할 일들이 눈앞에 보였다. 눈 속에 속눈썹 한 올이 들어가 불편한 적이 있다. 당장 빼내지 않으면 이물감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눈앞에 보이는 집안일도 속눈썹의 이물감처럼, 잠시도 미룰 수 없었다. 눈앞에 보이면 해치우지 않고서는 다른 일로 넘어가지 못했다. 하나를 해치우면 또 하나가 나오고, 부지런히 모두 해치웠다 생각하면 예상치 못한 일이 튀어나왔다. 집에는 분명 아무도 없었지만, ‘글 쓰지 마! 네가 해야 할 일이 여기 산더미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집에서 글을 쓰겠다는 생각은 버렸다. 쓸 수 없었다. 글을 쓰기 위해 갈 수 있는 곳은 도서관과 카페였다. 도서관은 조용하지만 노트북 자판을 두들기기에는 주변의 눈치가 보였다. 책을 읽는 조용한 공간에서 툭툭툭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유독 크고 신경질적으로 들렸다. 최종 선택지는 음악 소리가 크지 않은, 노트북 사용이 용이한 책상과 의자가 있는 카페였다. 다행히도 카페는 우후죽순 많아, 고르는 재미도 제법 있었다. 


나는 글을 쓰러 카페로 갔다. 그리고 집에 있는 아이들에게 “엄마, 글 쓰러 나간다”라며 밖으로 나갈 채비를 하면 초등학교 4학년인 둘째 아들은 “안 돼!”하며 내 손을 붙잡았다. “왜~” 물어보면, 돌아오는 대답은 명쾌하진 않다. 엄마가 집에서 나간다는 것만으로 심통이 나는 것이다. 


유명하지도 않고, 변변하게 글로 생업을 유지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글을 쓰러 나간다고 말하는 엄마를 마냥 환영해주는 가족은 안타깝지만 없다. 환영을 바라면서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니 감수할 수 있다. 엄마가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든든한 아이들의 심보를 모르는 것도 아니다. 집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의 주도권을 지금껏 엄마가 쥐고 있었으니 당연한 인과응보다. 


“엄마, 일하러 나간다”고 하면 어떨까. “잘 다녀오세요~”가 되겠지. 집에 머물지 못하는 엄마를 안타까워하는 것은 마찬가지겠지만, 밥벌이의 중요성은 모든 이가 공감할테니 딱히 이견이 없다. 그럼에도 밥벌이보다 중요한 것이 더 많다고 주장하고 싶지만, 가시적으로 제시할 만한 근거가 별로 없다. 한마디로 눈에 딱 하고 보여줄 만한 것이 없다. 특히 그게 글쓰기일 때는 더욱 그렇다. 장보러 나간다, 친구 만나러 나간다, 볼 일이 있다, 하면 마땅치 않아도 쉽게 보내주는 아이들이건만, 글 쓰러 나간다 하면 붙잡아도 될 것 같다. 아이의 심드렁한 눈을 마주하면 나 또한 발을 떼지 못할 것 같다. 그게 뭐라고, 카페까지 나가서 쓴다고 야단인가. 딱히 무엇을 쓰겠다는 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글쓰기의 맛을 조금씩 알아가고, 많은 배움이 필요하단 것만 뼈저리게 느끼던 때였다. 여러 종류의 글을 써보고, 다양한 분야의 글을 읽던 때였다. 환영의 인사가 아닌, 아이들의 투정을 들으며 집을 나서는 발걸음은 무거울 수밖에 없다. 글쓰기가 나에게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스스로 질문하며, ‘그래’라고 대답할 뿐이다. 


명절을 준비하러 시댁에 내려갔다. 4시간을 차로 이동해야할 만큼, 집과 거리가 있다. 시댁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고 음식장만에 여념이 없다. 여느 집의 며느리처럼 편한 옷을 입고 앉아 커다란 전기 후라이팬에 계란 옷을 입힌 전을 연신 구워댄다. 해가 뉘엿 질 때쯤이면 음식 장만은 거의 끝난다. 내 할 일도 거의 끝난 셈이다. 그 이후의 자잘한 일들은 시어머니의 몫이다. 나는 그제야 노트북을 챙겨 밖으로 나간다. 근방 카페로 향하는 것이다. ‘명절에도 글을 써요!’ 열성으로 글을 쓰는 사람을 상상하면 곤란하다. 단지, 제사는 다음 날이고 저녁 밥상을 물리면 다들 제각기 할 일을 한다. 멍하니 TV를 보느니, 카페에 나가 딱 한 시간만 집중해서 쓰고 싶었다. 며느리로서의 소심한 도전이기도 했다. 시댁에 가면 할 일이 있든, 없든 집 안에 머물렀다. 누가 그러라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글 쓰러 나갔다 올게요.” 아들처럼 “안 돼!”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고 환영해주는 이도 없었다. ‘글’을 쓴다고 하니, 노는 것과는 좀 다르게 생각되어진 것 같다. 뭔가 중요한 일을 하는 것처럼 보였나보다. 그런 분위기를 속으로는 반겼지만 밖으로는 내색할 수 없었다. 여전히 이렇게 나가도 되나,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용기를 냈다. 나에게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일이니까. 부랴부랴 짐을 챙겨서 나갔다. 그리고는 글 쓰러 나가는 불편한 나의 마음에 대해서 글로 풀어썼다. 어떤 반응이 나올지, 걱정되고 두려워하는 그 마음 뒤에 무엇이 숨어있던 것인지. 글로 질문하고 글로 대답했다. 두려움의 정체는 시댁이 아니었다. 그동안도 나에게 특별히 강요한 일은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며느리로서 시댁의 사랑을 받기 위해 강요받지도 않은 행동을 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은 노력에 혼자 힘이 빠지고, 혼자 외로웠다. 


두려움의 정체를 글을 통해 조금은 바라볼 수 있었다. 나의 고정된 생각들, 그 생각들은 어디에서 왔는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늘 처음이 힘든 법, 그 이후로도 매번 시댁에 갈 때마다 노트북을 챙겨 간다. 시댁에 가서도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되니, 시댁으로 가는 길이 한결 가볍다. 이번에는 또 어떤 마음이 깃들고, 어떤 마음을 풀어낼지 기대가 되는 것이다. 벌써 3년이 지났다.  이제는 제법 익숙하게 ‘글 쓰러 다녀올게요’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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